[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23)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자, 무엇이 두려운가

(가톨릭평화신문)


“130리 길을 마다치 않고 걸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눈이 쌓인 길을 걷다가 쓰러져 잠이 들기도 하고 다시 깨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인지 마리아 수녀는 이 대목에서 더 크게 읽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낭독을 들으면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몰려왔다.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밤낮 뱃멀미에 시달리는 그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돛대도 배도 식량도 다 내던져 버려야 하는 순간.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언제 체포돼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마주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떠나야 하는 상황. 그는 이런 지독한 현실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다 체포돼 사제가 된 지 일 년 만에 삶을 마감한 청년 사제, 김대건. 순간 나도 모르게 은근한 저항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두려웠겠지. 도망가고 싶고, 후회도 했겠지. 이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야.’

나의 이런 분심을 알아챘는지 마리아 수녀는 더욱 큰소리로 힘을 넣어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님을 믿으시오.” 이 대목에서 순간 시끄럽게 올라왔던 나의 마음속 저항이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렇지.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자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 두려움이 없으니 또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가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지는 죽기 전 자신의 목을 치려고 시퍼런 칼을 잡고 있는 형리에게 건넨 말 한마디에 확신이 생겼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편하게 나를 죽일 수 있겠소.” 이 얼마나 놀라운 모습인가. 더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빛나는 작은 점 하나를 잘 찍기 위해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이다. 그 작은 점이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걸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위대한 꿈이 있어 죽을 힘을 다해 고난의 강을 건넌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이 언제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2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그리 아쉽고 서글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더 크고 행복하니까. 그것을 믿으니까.

돌아보면 내 인생도 그저 한순간의 점을 잘 찍기 위해 돌아서 여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간 내가 얼마나 눈과 손, 가슴에 힘을 주고 저항하며 살아왔는지 느껴진다. 두려워서다. ‘오늘 할 일을 다 끝내야 하는데’, ‘김 선생님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어쩌면 그 사람은 하는 말마다 밉상인지 몰라’, ‘요즘 허리통증이 있는데 혹시 내 몸에 이상이 있나?’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만든 온갖 사소한 지껄임으로 가득하다. 두려움은 현실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자유롭지 않다. 안전을 확보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누군가에게 질타를 받아도 온몸이 굳어지고 뜨거워진다. 이 두려움과 싸울수록 상처는 커지고 아프다. 가슴이 닫히고 에너지가 막힌다. 두려움의 대상과 벽을 쌓고 통제하려 한다. 그럴수록 마음속 돌덩이는 쌓여만 가고 더 무겁다. 현실에 집착한 두려움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 수많은 순교자가 죽는 그 순간에도 찬양노래 부르며 웃으며 떠날 수 있었던 이유다.

오늘도 나는 두려움의 대상이 만들어낸 자존심, 욕심, 미움, 판단, 분노를 자유롭게 내려놓아야겠다. 죽음 이후의 더 행복한 삶을 믿기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성찰하기



1 우리 인생은 관광이 아닌 순례의 여정입니다. 관광은 시간과 장소라는 현실에 종속되지만, 순례는 매일 매 순간이 영원의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2 두려움의 대상은 잡으면 아프고, 놓으면 자유롭다는 것을 기억해요.

3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메시지를 인용해 매일 화살기도를 바쳐요.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나는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