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사목자를 찾아서] (7) 오도 하스 아빠스

(가톨릭평화신문)

마인 강변에 있는 독일 남중부 와인 마을 칼슈타트(Karlstadt).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건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에, 결혼까지 약속한 여인을 버리고 한국 선교사가 되겠다며 수도원 문을 두드린 한 마을 청년이 있었다. 바로 발터 하스(Walter Haas)이다.

그가 사고 친(?) 배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박해로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다 귀환한 연길수도원 소속의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나지움에서 발터 하스와 같은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겪은 일들을 들려주면서 선교의 필요성을 웅변했다.

애인과 결혼 약속까지 했던 21살의 혈기 왕성한 발터 하스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14살 사춘기 때 막연히 품었던 선교사의 꿈을 떠올리고 “한국의 선교사가 되겠다”며 1952년 인근에 있는 뮌스트슈바르자흐(Mü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장으로 교회 쇄신에 앞장섰던 오도(Odo) 성인을 본받고자 수도명을 ‘오도’로 정했다. 그는 1958년 사제품을 받고 그토록 소망하던 한국 선교사로 선발돼 1960년 입국했다.

이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초대 아빠스인 오도 하스(한국명 吳道渙, 87)이다. 1964년 2월 교황청은 왜관수도원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했다. 왜관수도원은 서울(1913년)ㆍ덕원(1927년)ㆍ연길(1934년)수도원에 이어 네 번째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한국 베네딕도회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당시 왜관수도원은 한국인과 독일인, 덕원과 연길수도원 출신, 왜관으로 바로 입회한 수도자, 덕원과 연길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과 왜관으로 바로 파견된 선교사, 성직 수사와 평수사 등으로 구분되는 수도자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그해 4월 28일 왜관수도원 초대 아빠스로 선출된 오도 하스 신부는 이들을 이끌고 인내와 관용, 포용의 일치 정신으로 하나 되게 해야 했다. 난관을 극복하고 새집을 지어 새 시대를 여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는 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오도 아빠스를 알고 있는 이들은 그를 ‘미래를 여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6일 사제 수품 60주년을 맞은 오도 아빠스를 왜관수도원에서 만났다.

▲ 오도 하스 아빠스.


연길수도회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 삶에 감동한 독일 청년 발터 하스

결혼 약속 뒤로한 채 수도회 입회, 사제품 받고 1960년 한국 입국

왜관수도원 초대 아빠스로 선출, 포용과 일치 정신으로 수도원 이끌어



▶사제 수품 60주년을 축하한다.

“감사하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에페 2장)라는 모토로 사제품을 받은 지 60년이 됐다.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수품 성구처럼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나 되는 마음으로 일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정신으로 베네딕도회 선교사로 살고 있다. 매일 수도원 일과 시간표대로 생활하고 있다. 교황과 한국, 일본, 필리핀, 대만 등 나의 선교지와 북한 교회, 독일의 은인들을 위해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한다. 그리고 수도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면서 기쁘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오도 하스 신부.

▶초대 아빠스 직책이 무거웠을 텐데.

“33살에 아빠스가 됐다. 한국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장상을 직접 선출하는 투표에서 아빠스로 뽑혔다. 당시 나도 투표했는데 왜관수도원을 위해 한국인 신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차 한국인 수도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외국인이 지도자가 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아빠스는 종신직이지만 10년 안에 한국인에게 물려주겠다고 다짐했는데 7년 만에 그 결심을 이뤘다.”

 

▶초대 아빠스로서 수도 공동체에 무엇을 강조했나.

“조화로운 삶이다. 조화로운 삶은 관심이 필요하다. 기도와 일은 베네딕도회를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이다. 또 베네딕도회원은 수도자와 선교사라는 이중 소명을 갖고 있다. 나는 뷔르츠부르크 신학생 시절부터 ‘선교 활동과 수도생활의 조화’를 고민했었다. 아빠스가 된 후 무엇보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라는 신원을 강조했다. 이를 기반으로 수도원을 쇄신해 나갔다. 당시 왜관수도원에 사는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선교사’라 불렀고, 한국인들은 자신을 ‘베네딕도 회원’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둘 다 잘못된 것이다. 참된 베네딕도회 선교사의 모습을 갖추는 데 최우선으로 노력했다.”

 

오도 아빠스는 선교 활동과 수도생활의 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례와 교육,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그의 쇄신 방향은 왜관수도원의 ‘한국화’에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 그는 공의회 문헌을 익히며 그 정신을 기반으로 수도원의 한국화 방향을 설정했다.

그에게는 먼저 독일인 수도자들이 한국인 장상에 서서히 익숙해질 수 있도록 왜관수도원 본원장에 덕원수도원 출신인 노규채 신부를 임명했다. 이후로도 재임 동안 황춘홍ㆍ이동호 신부를 본원장으로 임명했다. 또 수도원 부원장으로 연길수도원의 코르비니아노 슈레플 신부를 임명해 왜관수도원이 덕원과 연길수도원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세대 갈등을 극복하고자 했다. 또 한국인 평수사를 재정 담당으로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했다. 당시 교회법은 평수사를 수도원 중책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도 아빠스는 전례 쇄신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는 ‘전례가 곧 선교’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1964년 성탄 대축일 미사를 처음으로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했다. 또 이날 수도원 성당에서 처음으로 세례식을 거행해 10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1966년 이후 모든 사제가 매일 공동 미사를 집전하고 한국말로 성무일도(시간 전례)를 바치게 했다.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9년에는 「한국어 미사 경본」 개정판을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지급했다.

교육 문제에도 힘썼다. 수도자 교육과 교리교사 양성을 위해 대구 대명동에 ‘가톨릭 신학원’을 설립했다. 한국 교회 최초의 피정의 집을 짓고 분도출판사를 열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교육했다.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게 하도록 학교와 기숙사를 지어 청소년들을 교육했고, 노인 요양원과 한센병 환자와 결핵 환자를 돌볼 병원과 정착촌을 운영했다.

오도 아빠스는 관상생활을 희망하는 한국인 수도자들을 위해 1966년 부산 오륜대에 수도원을 지었다. 기대와 달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수도생활과 선교 활동의 조화를 이루려는 그의 노력은 수도자들의 기대를 늘 뛰어넘었다.

오도 아빠스는 1971년 2월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하고 일본 메그로 성 요한 수도원으로 떠났다. 이후 그는 2009년 다시 왜관수도원으로 정착할 때까지 일본과 필리핀, 대만, 로마에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빠스 사임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

“후임인 한국인 아빠스가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한국을 떴다. 일본 성 요한 수도원에서 10년간 있었고, 1981년부터 필리핀 민다나오 섬 남쪽에 디고스수도원을 설립해 20여 년 생활했다. 필리핀 수도원 정착과 발전을 위해 왜관수도원이 헌신적으로 도와줬다.”

 

▶2009년 한국에 돌아왔다.

“2004년에 한국에 와서 1년간 살다가 로마 성 바오로수도원에 파견돼 3년간 성바오로대성당 고해 사제로 생활했다. 이후 1년간 대만 수녀원에서 지도 신부로 살았다. 성소를 받고 난 후 첫 사랑이 한국이었다. 한국 사람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아 왜관수도원으로 되돌아왔다. 왜관수도원은 정말 성공했다. 형제들의 협력과 희생 덕분이다. 지금은 노쇠해 선교 일선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성령을 통해서 항상 베네딕도회 선교사로 살고 있다. 기도 안에서 또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항상 나를 이끌어 주시고 있다.”

 

왜관수도원 형제들과 한국의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해 조언을 청했다. 오도 아빠스는 “오해할 수 있어 두렵다”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국 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를 세계에 파견해야 한다. 보편 교회와 협력하며 복음 선포에 헌신해야 한다. 또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도와야 한다. 한국 교회와 한국인들도 그러한 도움을 받고 성장했다. 수도회는 물질의 이익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수도원을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모든 가치를 복음과 선교에 두고 살자. 눈앞의 이익을 좇는 것은 우리 신원과 어울리지 않는다. 왜관의 형제들이 우리가 베네딕도회 선교사라는 것을 늘 상기했으면 한다. 그리고 늘 북한 교회에 관심을 두었으면 한다. 한국 사람들 마음이 그리스도 마음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선교다.”

 

1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에도 지칠 줄 모를 만큼 유쾌하게 기자를 대한 오도 아빠스는 “한국을 사랑한다”며 “모든 이가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께 관심을 두고 기도했으면 좋겠다”고 인사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