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45)기다림에 설렘을 더한 사랑

(가톨릭평화신문)




“정말 예수님이 도둑처럼 몰래 오실까요?”

“아이고, 설마 우리 좋으신 주님이…. 그래도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겠소?”

“그렇죠? 그래야지요. 오시기 전에 뭐라도 준비해야 하고….”

식당의 주인 부부가 콩나물을 다듬다가 밥을 먹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서로 주고받았던 말이다. 그들의 대화가 어찌나 순박하고 따뜻하던지 무척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부부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자비가 넘치는 아버지였다. 그들은 주님 오심을 생각만 해도 마냥 즐거운가 보다. 나는 그때 그들의 기다림 깊숙한 곳에서 뭉클 올라오는 그 무엇을 느꼈다. ‘설렘’이었다. 그 기다림에 설렘을 더하니 순수한 사랑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나에게 ‘기다림’이란 무엇일까? 교통체증으로 인한 막연한 기다림은 나를 지치게 한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줄을 서고 기다려야 할 때는 지루하다. 건강에 이상이 생겨 검진 결과를 기다릴 때 두렵다. 직원들과 함께 찾은 맛집에서 기다려야 할 때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우리는 매일 그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 취직을 기다리고 승진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보상을 기다린다. 어떤 기다림은 희망을 주고 어떤 기다림은 고통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갈수록 기다림 그 자체를 견뎌내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어떤 기다림이건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마치 스마트폰을 수시로 확인하듯 기다림을 못 견디고 머릿속에서 그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려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버스가 올 텐데도 다급한 마음으로 버스 도착 정보판을 수시로 쳐다본다. 어떤 때는 아예 정보판만 바라보며 기다릴 때도 있다. 문자가 오면 바로 답해줘야 하고 카톡을 보내고 즉시 ‘1’이 없어지기를 확인한다. 분주함이 습관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디지털기기가 일상을 가속화하고 버튼만 누르면 즉각적으로 해결해주는 세상에서 우리는 기다림에 취약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빨리’가 대세이고 빠른 성과나 효율성이 없으면 쉽게 판단하고 포기한다. 그런데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은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하다.

나는 어느새 유목민이나 관광객이 되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이 정보에서 저 정보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로, 여기’가 내 자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 병원에서, 터미널에서, 버스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장소에는 영락없이 요란한 영상과 음향으로 그 기다림마저 잊게 만든다.

며칠 전 광주 가는 버스를 탔다. 3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목적지에 이른다. 묵주를 손에 들었지만 맨 앞에 앉은 나의 시선은 텔레비전으로 향한다. 각종 달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막창 순대의 달인은 박과 소금을 이용한 숙성 과정을 소개하고, 오이 김밥의 달인은 쌀겨와 가다랑어포를 사용해 오이를 숙성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순간 ‘숙성’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콕 박혔다. 숙성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성분 간의 상호작용과 조화로 원하는 맛을 얻어낸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와 포도주를 만들면서 숙성시키는 장면이 떠올랐다. 빵을 할 때도, 된장과 간장을 담글 때도, 그리고 무엇보다 겨우내 먹는 ‘김치’를 담글 때가 또 그러했다.

“좋은 음식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찌 음식뿐이랴. 새로운 일이나 상황에 적응할 때나 사람과의 만남도 그러하다. 신앙도 기도도 숙성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주님이 오신다. 나의 기다림에 설렘을 담고 싶다.

숙성과 기다림의 과정을 찬찬히 음미하면서.



성찰하기

1. 버스나 전철을 기다릴 때 도착 정보판이나 시계를 보지 않고 한가로움을 즐겨요. 한가로움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니까요.

2. 기다리는 시간은 영혼의 휴식 시간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말해줘요.

3. 기다림은 불필요한 시간이 아닌 더욱 성숙해지는 숙성의 순간임을 기억해요.

4. 깨어 기다리며 주님 오심을 준비해요, 설레는 마음으로.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