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누가 교회의 수레바퀴를 굴리나

(가톨릭평화신문)


서로의 말이 꿰어지지 않고 잠시 헛돌았다. 일의 순서와 과정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A는 답답했던지 책상으로 가서 신문을 갖고 와 펼쳐 보였다. 그러고는 어느 기사의 큼지막한 제목을 가리켰다. “완전한 이론보다 불완전한 실천이 낫다.”

무슨 일을 할 때 합당한 이론적 근거를 찾고 계획부터 세우는 건 호모 사피엔스의 습성이다.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더 뚜렷하다. 그런 부류는 세상의 복잡다단한 상황을 모두 한두 줄 이론에 꿰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다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오류라고 배척한다. 따지고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갈지자[之] 모양으로 굴러가는 이유는 그런 부류가 일으키는 혼란과 소동 탓이 크다. 그 혼란의 피해는 묵묵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안아 왔다. 역사는 늘 그 모양으로 지독히도 반복되고 있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윌 듀란트는 세계사를 5분 분량으로 요약해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즉답했다.

“역사책은 세계사를 피가 흐르는 붉은 강으로 묘사한다. 그 강은 유혈 참사를 일으키는 왕과 정치인, 외교관들과 그들의 사건을 담고 빠르게 흘러간다… 그러나 세상의 진짜 역사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강가에서 벌어진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부양하고 산다-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듀란트의 말마따나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은 따로 있다. 어설픈 이론과 편견투성이 이념을 등에 업고 큰소리 내는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얼마 전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 흘리는 강원도 산불 이재민들 앞에서 정치권은 국가안보실장의 국회 이석(移席) 책임을 놓고 ‘네 탓이오’ 공방을 벌였다. “촛불 정부인 줄 알았더니 산불 정부”라는 한 정치인의 잠꼬대 같은 비아냥도 들려왔다. 그들이 뉴스의 앞자리를 장식했을지언정 주인공은 아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들은 산불 현장으로 밤새 줄지어 달려간 소방대원들이다. 또 잿더미 옆에 밥솥 걸어놓고 이재민들 끼니를 챙겨준 자원봉사자들이다. 그들이 강가에서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키워내는 진짜 역사의 주역들이다.

교회 역사라고 다를 게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아프리카에서 60여 년간 조산사로 일해 온 마리아 콘체타 에수(85) 수녀를 바티칸으로 초대해 훈장을 수여했다.(본지 4월 7일 자 5면 참조) 콘첸타 수녀는 20대 초반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3000명 넘는 새 생명을 받아낸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다. 교황은 4년 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사목방문 중에 콘체타 수녀에게 잠깐 들은 선교지 이야기를 여태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콘체타 수녀의 삶은 이론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가 뉴스 전파를 탄 적도 없다. 허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평생 말없이 행한 자비의 실천, 그 단순한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생명력이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바리사이들의 나팔소리가 아니라 콘체타 수녀가 보여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그의 침묵과 희생적 삶이 곧 선교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 아침이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2019년 4월의 시공간 안으로 다시 오신 그분은 무슨 말씀을 하실까, 또 어디를 먼저 찾아가실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실 단순하다.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 A가 말하려 한대로 불완전하더라도 첫발을 떼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