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삼위일체 대축일 상념

(가톨릭평화신문)


답을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신자가 생각보다 많은 한 가지 물음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고백하지만 진짜와 사이비를 구별해 주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 답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포하는 교회라고 선전하면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지 않는 신자는, 또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사이비 그리스도교 신자이고 사이비 그리스도 교회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이다.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님은 성부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또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관계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의 영이자 아들의 영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의 친교로 충만한 일치를 이루신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을 이렇게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 또한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는 삶 자체가 관계의 연속임을 매 순간 체험하며 살아간다. 이 관계는 자신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일 수도 있고, 직장이나 다른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일 수도 있고, 나아가 사회 전체와의 관계일 수도 있다. 이렇듯이 다양한 관계가 원만할 때에 평화와 안정을 체험하지만, 관계가 복잡하고 뒤틀릴 때는 불안과 혼란, 나아가 분노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청되는 것들이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상대방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길일 뿐 아니라 내가 존중받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공동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틀렸다고 여길 때는 아집과 독선이 자리를 잡게 된다. 상대방을 경청하고 이해하기보다 내 생각이나 주장만을 내세워 강요하려 할 때는 불목과 갈등이 똬리를 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배척과 분열을 낳게 될 뿐이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사회, 특별히 정치 분야를 보고 있노라면, 뒤틀린 관계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함을 넘어 환멸감마저 느낀다. 여야 모두 국민을 위한다고, 민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속 좁은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정치인들의 아집과 편견에 희생되는 것은 국민이요 국가 경제다. 그렇게 되면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만 쌓여갈 뿐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뒤틀린 관계를 청산하고 회개하여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진정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한다면, 뒤틀린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에 먼저 나서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을 가리게 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