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시(視)와 견(見)

(가톨릭신문)


시(視)와 견(見). 우리말로 번역하면 둘 다 ‘보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視)는 보여진 것(示, 표시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견(見)은 눈동자에 맺혀진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알아챔(각, 覺)과 연관된다. 흔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視)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수동적이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춰지는 것을 보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시청(視聽)한다고 하지 견문(見聞)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견문(見聞)을 넓힌다고 할 때 견(見)은 단순히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모험은 언제나 두렵지만 희망적이고 이때 희망을 지탱해 주는 것이 믿음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모험과 희망 그리고 믿음에 의한 결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그 안에는 신뢰나 믿음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다. 신뢰나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하다. 동물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은 희망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희망하지 않는 삶은 주어진 대로 보거나(視) 들을(聽)뿐이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법.

희망함의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조건들에 자신의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음의 고통이 두려웠지만 새로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셨다. 이러한 희망과 믿음이 부족할 때 취하게 되는 선택은 단순한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탐하고 적립하며 다투는 것이다.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2-4)

오늘 제1독서 지혜서 말씀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 의인들은 생존만을 위해 사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기에 죽은 것처럼 ‘보일(視)’ 것이다. 똑같은 눈이지만 의인들의 눈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생존을 유지하면서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초현실에 정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눈을 감는다. 왜냐하면 생존 너머의 가치들은 삶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을 해결해 줄 것 같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의인들은 생존 너머에 존재하는 삶에 희망을 두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육체적 생명이 소멸하지 않는 희망이라기보다 육체적 생존을 넘어선 영원한 가치에 대한 희망이다.

누구나 죽음보다는 삶을 원하지만 때론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인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맹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도 같은 의미다. 목숨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챈(見) 것이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완성하려는 그것은 바로 사랑(仁)이다. 누군가를 사랑해 모든 것을 포기해도 두렵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할 때 그것이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음에도 모험을 감행한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희망하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이해한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사랑 고백이라기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자녀로서의 사랑은 믿음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목숨마저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하신다. 인류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을 포기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다. 모든 것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죽음이나 삶, 천사나 권세, 현재와 미래 이 모든 것들은 그분 앞에서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모든 이에게 베풀어졌지만 그것을 알아챌(見) 만한 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것을 외면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이미 선포된 복음을 듣고도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그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을 희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 것 너머의 삶을 희망해 육체적 생존에 연연하지 않았을 뿐이다. 희망이 지닌 불확정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존만을 추구하던 자들은 생명을 얻고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육체적 죽음으로 더 이상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소멸되는 완전한 종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는 것에 자신을 매어 둔 탓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었던 그분들은 모든 것이신 하느님으로 인해 육체적 목숨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으므로 육신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순교자들께서 목숨을 잃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분들보다 앞서 목숨을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見) 것이다. 그에 비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죽음만을 보았을(視) 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부활이 보일 리 만무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를 희망하며 살 것인가. 순교자들의 증거에서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눈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 사람의 아들은 요나의 기적 말고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던 예수님 말씀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서강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