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칼럼] 황일광 복자와 세습 사회

(가톨릭평화신문)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시복한 우리나라의 124위 중 대표격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지내 참수된 분으로 내게 각인돼 있다. 유교 전통의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간명한 말씀으로 윤바오로 못지않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분이 있다. 백정 출신 황일광 시몬 복자(1757~1802)이다. 교우들은 황시몬이 천민 중의 천민 출신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덕으로 감싸주고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대했다. 그래서 황시몬은 농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에게 천주교회는 살아서도 천국에서 사는 길을 열어준 한 줄기 빛이었다.

황시몬 복자를 떠올린 것은 ‘조국 사태’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 구조의 민낯이 다시 확인됐기 때문이다. 현세에서도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황시몬께서 하늘나라에서 우리 사회를 내려다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차고 계실지 모르겠다. 황시몬이 살았던 교우촌과 교회는 조선 시대 유교 질서의 근간인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ㆍ중인ㆍ평민들이 가진 재물을 서로 나누며 생활했다. 그러니 가난하지만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수저 계급론’은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자식들이 금ㆍ은ㆍ동ㆍ흙수저를 물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금수저 자녀들은 거주할 집을 포함해 큰 부를 상속·증여받을 뿐 아니라 화려한 스펙, 최고의 직장이나 교수ㆍ변호사ㆍ의사직 같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세습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스펙과 지위를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공정 경쟁과 비리로 세습한다면 다른 청년들은 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

신분 세습은 보수 세력에게 더 간절한 것이지만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조국 사태’는 불법과 편법과 비리로 금수저 신분이 더 고착화하고 세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법 세습은 주로 재력가와 고위 공직자 자녀들의 입시 및 취업 비리로 드러난다. 조국 법무부 장관뿐 아니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대대표 자녀의 문제까지 거론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50대 중후반인 386세대는 단군 이래 가장 잘살고 있는 세대, 20~30대는 단군 이래 부모보다 어렵게 살아야 하는 첫 세대라는 얘기를 요즘 자주 듣는다. 20~30대의 어려움은 확대되는 비정규직, 폭등한 집값, 늦어지는 결혼, 저출산, 자녀 교육비 문제만 떠올려도 금방 알 수 있다. 흙수저 청년들의 인생 출발선은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내세의 평화보다 지금 여기에서 실현해야 하는 현실적 평화, 마음의 평화가 아닌 생활 속의 평화에 더 큰 관심을 보이셨다고 한다. 이름만 대면 곧 알만한 한 유명 스님도 종교가 버려야 할 지식과 믿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극락이든 천국이든 우리가 두 발 딛고 서 있는 지구별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신앙 선조는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많은 선조가 황시몬 복자와 같이 신분 세습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천주교회가 신앙 선조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듯이, 20~30대들의 마음과 아픔을 대변하면서 그들이 현세의 천국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이끄는 ‘세상 속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