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7) 에필로그<2>-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①

(가톨릭평화신문)
▲ 바오로 사도의 생애는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진은 예루살렘 옛 도시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 이 문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CNS 자료 사진】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바오로 사도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하면서 그가 쓴 서간들을 살펴보는 것이 이 에필로그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그 서간들 자체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서간들을 썼는지 그의 활동과 서간들과의 관계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교회 박해에 나서던 유다인 사울

사도행전에 바오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스테파노의 순교 때였습니다. 최고 의회에서 스테파노의 설교를 들으면서 화가 치밀어오른 사람들은 그를 성 밖으로 몰아냅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돌을 던지면서 겉옷을 벗어 한 젊은이의 발에 두었는데 그가 바로 바오로였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지요.(7,58)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먼저 이름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의 첫 번째 선교 여행 때인 13장 4절까지는 그의 이름이 ‘사울’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다음 13장 9절에는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라고 ‘바오로’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되고, 그 이후에는 계속 ‘바오로’로 나옵니다.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이름이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뀐 것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한 후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과는 다릅니다. 단지 ‘사울’은 히브리어-아람어 표기이고 바오로는 그리스식 표기일 따름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그러면 왜 13장에 오면 이름이 바뀌게 될까요?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이 지중해의 키프로스 섬이었는데, 그 섬의 총독 이름이 세르기우스 바오로였습니다.(13,7) 키프로스는 히브리어-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티나와 달리 그리스-로마 문화권이었고 그래서 이때부터 사도행전 저자는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표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사울 또는 바오로라는 이 젊은이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에 앞장섰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8,3) 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을까요?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로마 제국 속주의 하나로 오늘날 터키 남부 지방인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 출신의 유다인입니다(21,39). 혈육은 유다인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22.28) 이 말은 바오로 집안은 부모 또는 그 이전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당시 예루살렘의 뛰어난 랍비로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5,34)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22,3) 바오로가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바리사이였습니다.(필리 3,5) 요컨대 그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종교적으로 충실한 골수 바리사이 유다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서는 부정적이었음이 분명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 더욱이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주장이 바오로에게는 얼토당토않게 들렸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그들에게 부활은 종말에 가서야 있을 먼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역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살아났다면서 예루살렘 최고 의회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스테파노의 말은 바오로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음의 혈기가 왕성했던 그는 스테파노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여겼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회 박해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어느 정도나 됐을까요? 「주석 성경」에 실린 ‘성경 연대표’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하고 교회 박해가 시작된 해는 기원후 36년 겨울에서 37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기원후 5~10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2008년에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는 바오로 희년을 지냈었지요. 이를 고려한다면, 바오로가 교회 박해에 나섰을 때는 그의 나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쯤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마스쿠스에서 겪은 회심 사건

사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서 모조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작정이었습니다.(9,1-2) 오늘날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당시에도 그리스-로마 문화가 융성한 대도시였습니다. 유다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고, 당연히 회당도 여러 개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색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아직 거의 전부가 유다인이었기에 회당을 통하면 ‘새로운 길’을 따르는 유다인들을 쉽사리 찾으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바오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바오로는 땅에 엎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면서 바오로가 할 일을 일러줍니다. 바오로는 땅에서 일어났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지내다가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바오로의 이 회심 사건을 사도행전은 세 번에 걸쳐 소개합니다.(9,1-19; 22,4-21; 26,9-19)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자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다가 곧바로 다마스쿠스의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며 활동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받드는 이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잡아가려고 다마스쿠스까지 왔다고 알려진 사람이 이제는 반대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당혹스럽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9,20-22)

그렇게 “꽤 긴 기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없애려고 공모했고 바오로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탈출해 예루살렘에 갔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9,23-26) 사도행전의 이 설명대로라면 바오로는 계속 다마스쿠스에서 지내다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심해지면서 탈출해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갈라 1,16-17). 이 서간에 따르면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간 것은 “삼 년 뒤”(갈라 1,18)였습니다. 바오로는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그곳에서는 무엇을 하며 얼마나 지냈을까요? “삼 년 뒤”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를 가리킬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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