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국인 사제, 죽음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 믿어 의심치 않아

(가톨릭평화신문)
▲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동상.



한국 천주교회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봉헌한다. 지난해 보편 전례력에 따라 전례력에 ‘미사 없음’으로 기록했다가 주교회의 결정에 의해 예전처럼 대축일 미사는 아니지만, ‘신심 미사’로 거행하게 됐다. 이에 김대건 신부의 삶과 발자취와 업적, 그 의미와 영성을 돌아본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청년 김대건

스물여섯 해. 청년 김대건이 살다간 생애는 짧았다. 보통 한 세대로 보는 30년도 그는 채 살지 못했다. 사제로 살다간 기간도 1년 1개월 남짓했다. 그런데도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처럼 사랑받고, 또 공경받는 사제가 한국 교회에 또 있을까?

‘첫 조선인 사제’라는 수식이 그에게 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제로서 그가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그 삶이 너무도 짧았기에 한국 교회에 남긴 인상은 더 강렬했을지도 모른다.

김대건 신부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그가 순교 직전에 남긴 마지막 회유문이다. 1846년 8월 29일 자로 조선 교우들에게 보내는 스물한 번째 마지막 편지다.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名)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란도 또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짧게 풀면 “모든 게 하느님 섭리 아닌 게 없다”는 말을 김 신부는 새남터에서의 순교를 18일 앞두고서 들려준다. 하느님 뜻과 섭리에 따르는 믿음으로 그는 모든 난관,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받아들이는 ‘순명’의 영성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군란 또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그가 남기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인간 삶이 갖는 의미가 하느님 섭리 안에 있다는 것, 또 섭리의 하느님께 대한 증거를 세상에 드러내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서 산 것처럼 살고자 힘쓰는 굳은 믿음이 담겨 있다.



김대건 신부가 남긴 서한들

김 신부의 삶과 영성을 보려면, 그가 남긴 서한을 더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842년 2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함대 에리곤호에 탑승한 이후 계속된 김대건의 조선 입국로 탐색과 3차례에 걸친 입국 과정에서의 심경을 고백하는 서한에 그런 선교 열정과 의지, 성모 신심을 엿볼 수 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이 참수당하고, 어머니 고우르술라는 의탁할 데 없이 구걸로 연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도 그는 오직 목자 없는 양 떼와도 같은 조선 교회만 생각했다.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면서 수백 리, 수천 리를 여행했고, 끝내 조선에 입국할 때는 발걸음 소리를 줄이기 위해 엄동설한의 눈길을 맨발로 걷는 고통마저 감내했다. 입국해서도 10여 년 만에 만난 가족과의 상봉도 며칠뿐, 또다시 선교 여정에 매진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그 자비에 의탁하지 않았다면, 또 성모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터다.

특히 1845년 4월 말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고자 현석문(가롤로) 등 조선 교우들 11명과 함께 중국 상해로 가는 과정에서 폭풍우를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김 신부의 돈독했던 성모 신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1845년 7월 23일 자 열일곱 번째 서한에 그 정황이 상세히 소개된다. “강남으로 오기 위해 배 두 척을 샀는데, 하나는 크고 또 하나는 (작은 데) 폭풍우로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강남으로 오는 데 근 한 달이 걸렸고, 두 번 폭풍우를 겪었습니다. 우리가 강남 근방 바다에 있을 때 해적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정 성모 마리아의 보호로 감히 우리를 약탈하지 못하였습니다.…”

배의 돛과 키를 부수는 폭풍우를 만나자 김대건은 선원들에게 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 상본을 들어 보이며 “여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계시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모 신심에 의탁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간난신고 끝에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입국한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그는 그해 8월 17일 사제품을 받는다. 첫 조선인 사제의 탄생이었다. 이처럼 힘겹게 사제가 됐지만, 김대건 신부의 조선에서의 사목은 7개월 남짓했다.

그해 8월 31일 중국을 떠나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강경 황산포에 도착한다. 1845년 10월 12일이었다. 그로부터 이듬해 5월 12일, 만주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고자 서울 마포에서 출발해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그해 6월 초 순위도에서 체포돼 해주 감영을 거쳐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기에 이른다. 그 짧은 사목 중에 그가 남긴 서한에는 조선 교우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그중 하나가 1845년 3월과 4월 사이에 쓴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신자들이 차차 신앙심이 불타올라 열성이 자라나고, 배교자들은 뉘우치고 회두하며, 사방에서 외교인들이 입교한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천주교는 지금 찬미를 받고 신자들은 정직한 사람들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여 주십시오.(마태 9,38)”



순교 영성

그러나 김 신부의 삶과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순교 영성이다. 그에게 순교란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삶이었고, 하느님 앞에 가장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순교 영성은 순교자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열매였다.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9∼1814) 복자로부터 비롯돼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 ?~1816) 복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796~1849) 성인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가풍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김 신부의 순교 영성은 마지막 회유문에서 잘 드러난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님을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