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참석자 대부분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다

(가톨릭평화신문)
▲ 김태 선생의 ‘명례방 집회’. 명동대성당 소장.



이벽의 설법 장면과 제건(祭巾)의 모양

「벽위편」에 실린 이만채(李晩采)의 글이다. “을사년(1785) 봄,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장례원(掌禮院) 앞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설법하였다. 이벽이란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쓰고 어깨에 드리운 채 정 가운데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를 일컬으며 책을 낀 채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며 가르치는 것이 우리 유가에서의 사제의 예법에 비하더라도 더욱 엄격하였다. 날짜를 약속해서 모인 것이 거의 몇 달이 지났으므로,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인 자가 수십 인이었다. 추조(秋曹)의 금리(禁吏)가 그 모임을 도박판으로 의심해서 들어가 보니, 대부분 낯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는데, 손가락을 드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했다.”

1785년 모임에 다산 3형제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조금 낯설다. 설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를테면 미사의 집전과 강론을 한 것일 테고, 당시 이들이 옆에 끼고 있던 책은 앞서 8일간의 피정을 말할 때 설명했던 마이야의 「성년광익」 또는 「성경광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연히 언해본이 아닌 한문 원본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 이벽 등이 천주교를 믿고 따른다는 말에 이가환이 이를 나무라자, 이벽이 그와 논쟁하여 이가환의 말문을 막은 일이 있었다. 이에 이가환이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겠다고 하니, 이벽은 「성년광익」 한 부가 있었지만, 이가환이 성스러운 기적을 믿지 않을까 염려해서 이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는 내용이 황사영의 백서 속에 나온다. 이벽이 이미 「성년광익」 한 질을 갖춰두고 공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사제간의 예법이 엄격해 보였다고 한 것은 집전자이자 강론자였던 이벽의 권위가 엄연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사제의 역할을 이승훈이 아닌 이벽이 맡았다는 얘기다. 사실 이벽의 권유에 의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의 신심은 당시 북경에서도 영세를 줄 수 있느냐로 논란이 있었을 만큼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해 전부터 천주교 공부를 집중적으로 계속해온 이벽을 능가할 사람은 당시 조선에는 없었다.

▲ 마태오 리치 신부 초상.

한편 이벽에 대한 묘사에서 청건(靑巾)을 ‘복두수견(覆頭垂肩)’, 즉 푸른 두건을 써서 머리를 덮고 어깨 위에 드리웠다고 적었다. 마태오 리치의 초상화에 나오는 두건처럼 관(冠)을 머리 위에 쓰고, 그 뒤로 두 개의 길쭉한 천을 달아 양어깨로 드리운 모양이었을 것이다.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정리한 「미사제의(彌撒祭義)」에 당시 이벽이 썼다는 제건(祭巾)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사방 둘레에 모두 나부끼는 판이 있고, 세 번 꺾은 줄이 있다. 한 모서리는 앞쪽을 향하고, 뒤편에는 두 개의 길게 드리운 띠가 있다. 이것이 바로 제건(祭巾)이다(上方下圓, 四圍俱有飄版, 俱有三折線路, 以一角向前, 後有二長垂帶, 卽祭巾也)”라고 설명했다. 당시 이벽이 썼던 제건의 모양도 이것과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분면청건(粉面靑巾)의 이유


위 「벽위편」의 기술에서 더 주목을 끄는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가 ‘분면청건(粉面靑巾)’을 하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참석자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미사를 드린 것은 알겠는데, 얼굴에 분은 왜 발랐을까? 앞서 권일신이 이 사건 이후 8일 피정을 진행한 것과, 근거 경전이 바로 「성년광익」과 「성경광익」인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날 이들이 얼굴에 분을 바른 것도 분명 교회력에 따른 전례의 일환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승훈은 1784년 봄에 귀국했다. 그의 북경 체류 기간은 1783년 음력 12월부터 1784년 2월까지이니, 혹 그 기간에 보았을 의례를 본떠 행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다. 우선 이벽의 제건과 달리, 나머지 사람이 쓴 청건은 아마도 복두(?頭)의 모양이 아니었을까 한다.

굳이 푸른색으로 통일한 것에는 어떤 뜻이 담겼을까? 당시 미사 때 입는 제복(祭服)은 흰색, 빨간색, 검은색, 하늘색, 녹색을 때에 맞춰서 썼다. 「미사제의」에 하늘색의 의미를 설명한 대목이 보인다. “천청(天靑) 즉 하늘색은 하늘의 바른 색이니, 겨울과 봄에 많이 쓰고, 재일(齋日)을 만나 혹 힘들게 공과(功課)를 행하며 천주께 기구할 때 모두 이것을 쓴다. 대개 이 색깔은 하늘과 가깝기 때문에 천주와 통하여 도달하기를 원하는 자가 입는다(天靑者, 天之正色, 冬春多用. 凡遇齋日, 或行苦功, 祈求天主之時, 皆用之. 盖此色近天, 故願通達于天主者衣之)”라 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조한건, 「성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 사학과 박사논문, 2011 참조)

한편 얼굴에 분을 바르는 의식은 아무래도 ‘재의 수요일’ 예식을 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싶다. 재의 수요일을 당시에는 ‘성회예일(聖灰禮日)’로 불렀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뜻에서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행했다. 「성년광익(聖年廣益)」의 「성회예의(聖灰禮儀)」 항목에서는 이 의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개 성회(聖灰)란 영혼의 거룩한 약제(藥劑)이니, 각 마음의 병을 능히 낫게 해준다.(蓋聖灰爲靈魂之聖劑, 能療各心之病.)” 또 “네가 사람이 됨은 재로 만든 것임을 기억하라. 어제 재에서 나서, 내일에는 반드시 재로 돌아가리라. 천주께서 재로 정신의 병을 치료해주신다…오늘 천주의 약제와 천주의 말을 빌려 재를 써서 이마에 찍으면서, ‘벗이여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微小)하기가 모두 재와 같을 뿐이라, 천주께서 재를 가지고 사람의 몸을 만드셨으니, 그 몸은 얼마 못 가서 또 재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여라’라고 말한다.(可記爾爲人也爲灰也. 昨日生於灰, 翌日必歸於灰. 天主以灰醫其神病… 因今日借天主之劑, 天主之言, 用灰點額, 而云: ‘友憶汝始終之微, 皆灰而已. 天主以灰造成人身, 身未幾且歸灰矣.’)”

이날 이들이 흰 재를 이마에 바르고 있었다면, 영문을 모르는 파수꾼의 입장에서 보면 영락없이 사내들이 얼굴에 분을 발랐다고 착각할만했을 것이다. 다만 교회력으로 확인해 보니, 1785년의 재의 수요일은 양력 2월 9일이었고, 음력으로 환산하면 1월 1일, 정월 초하루로 나온다. 음력 3월 중순과는 도저히 날짜를 맞출 수가 없다. 하지만 초기의 엉성했던 전례 지식과 정보를 고려하면, 이들이 당시에 그레고리안력에 의거해서 정확하게 로마 교회의 전례를 실행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교회의 전례를 체험한 이승훈의 기억에 바탕을 둔 전례 적용이었다고 볼 때, 이승훈이 북경에 체류할 당시 1784년 음력 1월에 체험했을 성회예의 행사를 떠올려, 3월에 이를 적용해 보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시 이들은 명례방에 모여 회개와 다짐의 의식을 행하면서 「성년광익」 3편에 실린 「성회예의」의 설명에 따라, 이승훈이 북경 체류 당시 직접 보았던 성회예의의 의식을 재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명동대성당의 ‘명례방 집회’ 성화(聖畵)

현재 명동대성당에 걸려 있는 명례방 집회 모습을 그린 성화는 화가 김태 선생의 작품이다. 정웅모 신부의 그림 해설(2018년 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5면)에 따르면 장면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화가는 이벽이 입고 있는 하늘색 두루마기가 그가 지금 천상의 진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나타내고,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십자고상과 「천주실의」이며, 앞쪽에 공간을 비운 것은 후대에 주님을 믿게 될 사람을 위해 남겨둔 자리라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각각의 인물 배치도 구체적 인명을 염두에 두고 그린 섬세한 작품이다.

다만 그 복장이 「벽위편」에서 묘사한 분면청건이나 푸른 두건이 머리를 덮고 어깨에 드리운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쉽다. 기록에는 이벽 뿐 아니라 대부분의 참석자가 청건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발랐다고 썼다. 인물들은 청건을 쓰고 있었기에 이마에 묻은 흰 재가 더욱 도드라져서 포졸들 눈에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 「벽위편」에서는 “마침내 예수의 화상과 서책과 물건 약간을 적발하여 추조에 보냈다(遂捉其耶蘇畵像及書冊物種若干, 納于秋曹)”고 썼다. 적어도 이벽이 앉은 뒤쪽 벽면에 예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또 ‘거지해이(擧指駭異)’라고도 썼는데, 손가락을 드는 행동이 해괴하고 이상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성호를 긋는 모습이 이렇게 보였던 듯하다.

이 작품은 작가의 깊은 이해와 해석이 담긴 걸작임에 틀림없고, 오랫동안 신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성화는 한 장면을 여러 화가가 나름의 해석을 담아 그리는 것이니, 청건을 쓰고 예수의 성상(聖像)을 걸어둔 형태의 그림도 새로 한번 시도해봄 직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벽위편」의 명례방 집회 장면에 대한 묘사는 당시 이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청건까지 마련해서 썼을 정도의 열성을 보였음을 보여준다. 분을 바른 것은 재의 수요일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은 이미 미사 전례나 복식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