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발전에 헌신한 겸손한 사제, 하느님 품에 안기다

(가톨릭평화신문)


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는 오랫동안 고인과 함께했던 한국 교회 주교단과 사제, 신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거행됐다. 16년 동안 교구장 주교로서 춘천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한 기간까지, 57년이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폭넓은 학식과 겸손을 겸비한 사제로 살아온 고인과의 이별에 모든 이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장익 주교 유언 중에서)

장익 주교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죄인’이라며 한없이 낮췄다. 9개국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우리 고전과 동서양 철학과 유교 사상 등 다방면에 풍부한 학식을 겸비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장 주교의 모습을 높이면 극구 손사래를 치던 겸손한 주교였다.

장 주교는 이날 발표된 마지막 유언에서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라며 그저 목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를 크나큰 주님의 은총으로 여겼음을 전했다.

장 주교는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라는 그의 주교 수품 성구대로 춘천교구와 남북, 보편교회가 하나 되도록 평생 헌신한 목자였다.



○…연일 장맛비로 폭우가 예상됐지만, 장례 미사 당일인 8일 오전 춘천시 하늘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주교단 30여 명과 함께 사제, 수도자, 신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성전에는 150여 명만 입장해 거리를 두고 앉았으며, 많은 이가 성당 마당 야외 좌석을 메웠다.

방역 수칙을 지켜야 하는 탓에 성가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도 유가족을 비롯해 장 주교와 평소 가까이 지냈던 사제와 신자들은 이따금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스크 너머로 흐느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장 주교의 외조카 공요한(요한)씨를 비롯해 유가족 10여 명이 자리했다. 앞서 6~7일 이틀 동안에는 장맛비와 코로나19를 뚫고 장 주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각계 인사와 교구민들의 조문행렬도 이어졌다. 장례 미사와 빈소 풍경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고별식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의 애도 메시지가 낭독됐다.

염 추기경은 “9개국 언어를 하신 장 주교님의 열 번째 언어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언어’였다”며 “주교님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영성은 신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됐다”고 추모했다. 염 추기경은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국민들의 고통과 질곡의 삶 한가운데를 사시면서 모두의 고통과 상처 치유를 위해 노력하셨다”며 “한일 주교교류 모임을 통한 역사 바로알기,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며 북한 신자들을 헤아리는 활동, 인도적 대북지원 및 북한 동포 돕기 사업 등은 모두 하나 되도록 하는 실천이었다”고 전했다.

40년 지기요, 동료 주교로 각별했던 김희중 대주교는 내내 흐느끼는 목소리로 고별사를 읽어내려 갔다. 김 대주교는 “장 주교님은 로마 유학 중 가끔 저를 차에 태우고 다니셨는데, 주교님의 차는 폐차 직전이었고, 비 오는 날에는 녹이 슬어 구멍 난 밑바닥에서 구정물이 올라와 다리를 들어올려야 할 때면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검소했던 고인의 삶을 떠올렸다. 김 대주교는 “당신이 평소 보여주신 겸손, 검소, 소박함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주교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미사 후 유가족과 주교단, 교구민은 장례 미사 후 운구 차량에 태워진 고인을 향해 일제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 주교의 유해는 교구 방침에 따라 화장을 거친 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에 안치됐다.



○…장익 주교의 검소함은 잘 알려져 있다. 성구와 제의는 주교품을 받을 때 마련했던 것만 줄곧 썼고, 누군가 옷을 선물하면 체구가 비슷한 후배 사제들에게 곧장 나눠줬다. 30년 넘은 가방, 한두 개뿐인 외투, 고장이 나도 몇 번이고 고쳐 쓴 컴퓨터와 전자제품 등이 그의 소박한 삶을 대변한다. 평소 도토리 임자탕과 두부를 좋아했던 장 주교는 가끔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파스타 요리를 직접 해주는 등 소탈한 모습을 유지했다.

8년간 실레마을 공소 주교관에서 장 주교의 식복사를 지낸 한요세피나씨는 “제가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해도 늘 존댓말로 이야기하셨고, 산책과 차 한잔 할 때에도 다양한 책과 학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며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주교님께서 해주신 파스타가 그립고, 지금이라도 오셔서 말씀을 건네실 것만 같다”고 했다.

춘천교구장 부임 이후 지금까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를 이어온 김학배(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만난 각국의 사제들이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중에 장 주교님이 불어, 이탈리아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며 그들의 대화를 통역했는데, 그들이 너무 소박한 모습의 주교님을 몰라보고 놀랐던 적도 있었다”며 “교구장 시절 여러 본당과 작은 공소를 일일이 방문하셨던 주교님은 6차례에 걸친 항암치료 후 수척해지신 상황에서도 특히 냉담 교우 회두를 걱정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같은 서울 혜화동본당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형제애를 지키며 지내온 정진석 추기경은 본지에 보내온 특별 애도 메시지를 통해 “장 주교님은 나와 성당 친구였고, 성직자로, 주교로서도 각별한 친구였다”며 “교회와 사회의 인재였던 주교님과 한 시대를 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함께한 것은 참으로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장 주교와 미국 메리놀 소신학교 때부터 동기로, 북한 지원사업에도 함께했던 70년 지기 함제도(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도 “당시 미국에 막 오셔서도 주교님은 언어를 단숨에 터득해 신학교에서 성적도 1등을 했었다”며 “북한과는 늘 평화, 대화, 화해를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장익 주교와 동갑내기 육촌지간인 장명선(안드레아)옹은 “주교님은 5대에 이르는 우리 천주교 집안에서도 신앙의 표본이셨다”며 “선종 소식을 듣고 마리아, 요셉 성인께 ‘하느님의 종 주교님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