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최양업 신부만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서명

(가톨릭평화신문)
▲ 교황청 포교성성은 직할 선교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 책임을 맡겼다. 그림은 사제 서품 직후 조선으로 파견되고 있는 선교사들의 모습.



주님 봉헌 축일인 2월 2일은 ‘축성 생활의 날’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제정해 1997년부터 기념해 오고 있는 이 날은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이 자신의 신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축성 생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축성 생활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에 지내는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두 사제의 선교사 자의식과 사도생활단으로 교황청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정신에 관해 알아본다.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Missionnaire Apostolique Coreae)

김대건ㆍ최양업 신부가 자기 신원을 밝힐 때 쓴 표현이다.

김대건 신부는 생전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21통의 편지를 썼다. 그중 2통은 유실되고 현재 19통의 편지가 전해지고 있다. 최양업 신부도 신학생 때인 1842년 4월부터 선종 전인 1860년 9월까지 20통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썼다. 그중 1854년 9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유실돼 19통이 전해지고 있다.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헌신했다. 또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조선의 복음화와 교회 성장을 위해 선교와 사목을 하면서 그 과정을 편지로 남겼다.

김대건 신부는 편지 끝 부분에 ‘김해 김 안드레아’ ‘조선인 학생 김 안드레아’ ‘조선인 김 안드레아’라고 서명했다. 최양업 신부도 ‘조선인 아들 최 토마스’ ‘조선 선교지의 부제 최 토마스’ ‘조선인 탁덕 최 토마스’라고 서명했다. 김대건 신부가 여러 편지에서 자신을 ‘김해 김씨’임을 밝힌 것과 달리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임을 유독 강조했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가 자신들을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신원을 밝힌 것은 딱 한 번씩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6월 8일 한양 감옥에서 베르뇌ㆍ메스트르ㆍ리브와ㆍ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이들 공동 수취인은 모두 김대건 신부의 스승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 편지에서 순교 전 자신을 사제로 양성한 파리외방전교회 스승 신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조선 교회와 조선 신자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다방면으로 힘써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형제 최양업 신부에게 자신의 어머니 고우르술라를 맡기고, 하느님께서 순교의 은총을 주실 것을 청한다.

김대건 신부는 스승과 친구 최양업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장엄하게 드러냈다.

최양업 신부는 1851년 10월 15일 충청도 절골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8번째 편지)에서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자신을 드러낸다. 최 신부는 이 편지는 당시 조선 교회의 상황과 박해 중에도 신앙과 성사 생활을 이어가려 희생하는 조선 신자들의 놀라운 신심, 감동적인 개종 사례, 자신의 부모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의 순교 장면을 소개하면서 자랑스러운 듯 자신을 “지극히 미약한,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밝힌다.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는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만이 쓴 표현이다. 1658년 창립한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직할 선교 단체로 출발했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모두는 자신을 ‘교황 파견 선교사’(Missionnaire Apostolique)라고 신원을 밝혔다.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조선에 파견된 브뤼기에르ㆍ앵베르ㆍ페레올ㆍ베르뇌ㆍ다블뤼 주교와 모방ㆍ샤스탕ㆍ메스트르 신부 등 모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표현했지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밝히지 않았다. 다만 모방 신부는 자신을 ‘조선 선교사’(Missionnaire Coreae)라고 서명했다.

아울러 김대건ㆍ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4월에 함께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ㆍ정규하ㆍ강성삼 신부는 자신을 ‘방인(본토인) 신부’(indigena sacerdos) 또는 ‘불초자’(veser humillimus)라고 했지 결코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만이 자신을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표현한 것에 관해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더욱 연구해 볼 필요가 있지만, 이 표현은 두 신부님의 선교사로서의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조 신부는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님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조선인이기에 회칙에 따라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자격이 없었다”면서 “교황청 직할 선교 단체인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이 아니기에 ‘교황 파견 선교사’라고 서명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조선의 선교사요, 교황을 대리해 사목하는 조선대목구의 사제라는 자의식으로 독특한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조 신부는 그러면서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님의 이 서명에 관해 어떤 이의를 표하지 않은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면서 “파리외방전교회도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님이 같은 회원은 아니지만, 교황 파견 선교사로 인정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고 말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정신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1658년 팔뤼 주교와 랑베르 주교가 설립한 프랑스 최초로 교구 소속 사제들로 결성된 외방전교회이다.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재위 1621~1623)은 1622년 선교 업무를 총괄하고 지도, 감독하는 교황청 포교성성을 신설하고, 파리외방전교회를 포교성성 직할 선교 단체로 정했다. 이에 파리외방전교회는 1700년에 총 14장으로 이루어진 회칙을 제정한다. 그중 제1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선교 정신과 선교 활동의 기본 원칙을 담았다.

이 선교 활동의 기본 원칙은 ①본토인 성직자 양성 ②새 신자 사목 ③비신자 선교이다. 회칙은 “언제나 둘째보다는 첫째를, 셋째보다는 둘째를 우선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선교 활동에서 본토인 사제 양성을 우선하도록 했다.

이처럼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파견된 여느 수도회와 달리 선교 지역에서 본토인 성직자가 다스릴 자립 교회를 설립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이러한 목표가 성취했을 때 지체 없이 선교 지역을 교황청에 반납하고 다른 선교 지역을 개척하러 떠나게 되어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교황청 직할 선교 단체로서 선교 지역에 정식 교계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또 독자적으로 선교 지역을 개척하고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 단체가 아니다.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교계 제도를 설립할 때까지 임시로 설치한 교황대리감목구 즉 대목구(代牧區, Vicariatus Apostolicus)를 맡아서 이끄는 사명을 부여받은 단체이다. 따라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활동은 교황청 포교성성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시적으로 주어진 선교 지역을 관할하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