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라틴어 찬가에 찬사가 쏟아지다

(가톨릭평화신문)
▲ 장일범 음악평론가



드보르작은 차이콥스키 덕분에 뜻밖의 미국행을 떠나게 된다. 미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언제나 유럽의 슈퍼스타를 갈구하는데 19세기 말에도 물론 그랬다.

1892년 뉴욕 맨해튼 17가와 어빙 플레이스에 사립 아메리카내셔널음악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of America)을 설립하는데 음악원 설립자이자 후원자인 지넷 서버 여사는 무게감 있는 유럽의 슈퍼스타가 필요했다. 에너지 넘치는 서버 여사는 당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차이콥스키에게 초대 원장직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바쁘고 미국에 갈 마음이 없었던 차이콥스키는 이를 거절한다. 차이콥스키만큼 유명한 작곡가를 물색하던 재단은 차이콥스키의 친구인 체흐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에게 원장직을 제안한다.

프라하음악원 교수이자 원장직을 맡고 있던 드보르작은 미국에서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빈에 와서 음악생활을 하라는 제안을 독립운동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미국이라는 ‘신세계’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프라하음악원 월급의 세 배가 넘는 거액은 물론, 매년 10회씩 지휘하는 조건으로 4개월 동안의 휴가까지 보장했기 때문이다. 드보르작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1891년 10월에 아메리카내셔널음악원장에 선임된다. 1891년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냈던 드보르작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긴 휴식을 갖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6월이 되자 지넷 서버 여사는 10월 12일에 초연할 크리스토퍼 컬럼버스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축하하는 거대한 칸타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서버 여사는 드보르작의 뉴욕 도착에 맞춰 이 곡을 환영의 곡으로 공연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가사가 도착하지 않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드보르작은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 매우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곡의 방향을 바꿨다. 축제성이 풍부하고 깊은 종교적(가톨릭) 확신으로 가득 찬 위대한 라틴어 찬가인 ‘테 데움’(Te Deum Laudamus, 우리는 주님 당신을 찬미하나이다)으로 정했다.

드보르작은 이 곡의 스케치를 하자마자 일주일 만인 7월 말에 완성했다. 원래 서버 여사가 의도한 대로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이 되지는 않았고, 공연 예정일 2주 후인 1892년 10월 21일 드보르작의 지휘로 오케스트라와 250명의 합창단과 함께 뉴욕 카네기홀에서 초연했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보헤미안 농촌 정서와 밝고 신나는 리듬, 압도적인 오케스트라와 합창, 소프라노와 베이스 솔리스트의 조화는 연주자들과 청중에게서 열광적인 반응과 찬사를 받았다. 결국 드보르작은 1892년부터 1895년까지 3년간 미국에 머물면서 흑인 음악과 인디언 음악에 큰 영감을 받고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 ‘아메리칸’, 현악 5중주, 첼로 협주곡 같은 불멸의 명곡들을 작곡하게 된다.

애초에 차이콥스키가 이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으면 미국의 영향을 가득 담은 드보르작의 명곡들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차이콥스키가 이 원장직을 수락했다면 1893년 10월 교향곡 6번 ‘비창’ 초연을 지휘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차이콥스키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니 인생에서 선택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증명해 주는 장면이다.




※QR코드를 스캔하시면 드보르작의 ‘테 데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sZRfLKh1-M



장일범(발렌티노, 음악평론가, 서울사이버대 성악과 겸임교수, ‘장일범의 유쾌한 클래식’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