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영성 이야기] (23)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가톨릭신문)


아이가 어릴 때는 그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럽다. 자라면서 점점 미운 짓을 하게 되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다 보면 그렇게 예쁘던 아이가 점점 못마땅해진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 우리 부부에게도 그때가 찾아왔다. 너무나 사랑스럽던 아이가 영 달라졌다. 뭘 물어봐도 단답형 대답만 돌아오고 알아서 척척 하던 녀석이 할 일을 미루고 게으름을 피우더니 중학생이 된 뒤로는 성적도 자꾸 떨어져 갔다.

아이에 대한 걱정과 조바심으로 어느 날 성당에 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그때 내 마음에 들어와 아직도 머물고 있는 장면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이었다. ‘하느님,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중2까지 기다렸으면 많이 기다린 것 아닌가요?’하며 항변하듯 묻는 나에게 아들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억장을 무너뜨리는 광경이었다. 성모님이 겪으신 일생의 고통 앞에 나의 2~3년 기다림은 그저 어린아이의 투정에 불과했다.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이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화였다. 아이가 내 맘에 드는 아이로 변하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아이의 어떤 모습도 사랑하게 될 만큼 나를 키우고 성장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모범생으로 살며 성실하게 자기 할 일을 잘하는 남편은 나보다 더 아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다. 아이에 대한 불만은 나에 대한 불신이 되어 돌아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어지러운 방이나 미루는 습관이 모두 나에게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아이를 잘못 키운 것 같다는 자괴감이 커져 속상한데 바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을 등한시한 남편이 이제 와서 아이를 잘못 키운 탓을 나에게 돌리는 것 같아 몹시 억울했고 치사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예민해져서 싸우게 되고 서로를 탓하게 되어 점점 대화를 피하게 되었다.

그 무렵 아이가 휴대폰 게임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며 한참을 나무라는 일이 있었다. 남편은 이번 참에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서 바로잡아놓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아이는 마음의 상처를 받아 눈에 띄게 아빠를 멀리했고 대화는커녕 눈도 맞추지 않고 지냈다.

우리 부부가 ME주말을 체험한 게 그 무렵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그동안 나누기 힘들었던 대화를 하고도 감정을 상하지 않을 수 있음을 체험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나면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던 아이에 대한 대화도 다시 해볼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남편에게는 좋은 아빠라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준 아이와의 갈등은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태로 시간이 더 길어지면 더 회복하기 힘들다며 아이와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고 남편도 동의했다.

아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남편은 오랜 시간 고민했다. 2~3년이 흘러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결심을 하고 아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에 말을 걸었다. “한결아, 너 중2때 핸드폰 사건 때문에 아빠가 너에게 심하게 했던 일 정말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하며 피식 웃었다. 그날부터 기적처럼 둘 사이의 갈등이 눈 녹듯 녹았고 다시 다정한 부자 관계로 돌아왔다. 남편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아들에게 사과한 일이라고 말한다.

자녀와의 관계의 시작은 부부 관계이다. 부부가 단단한 신뢰로 살아갈 때 자녀와의 갈등이나 자녀로 인한 어려움도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부부 관계는 뒷전인 채 아이만 바라보고 아이에게 집착하는 부부를 보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보는 듯 위태하다. 자녀를 잘 키우고 싶은 부부들은 부부 관계부터 점검해보고 부부 성장을 위해 ME주말을 꼭 체험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줄 최고의 선물은 다정하게 살아가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다.




고유경 (헬레나·ME 한국협의회 총무 분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