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죽고 싶어요!

(가톨릭신문)
2003년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결재를 마치고 대대장실을 나섰습니다. 마침 기상 때문에 운항이 모두 취소돼 부대 순찰을 돌기로 했지요. 활주로를 돌아 항공기 계류장을 점검하고,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수송부를 찾았습니다. 수송관은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뛰어나와 안내를 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수송부 운영에 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다시 순시를 위해 막 일어서려는데 수송관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했습니다. “수송관! 할 말 있어요. 무슨 말인지 해 봐요. 속에만 담아두면 병나요”라고 넌지시 운을 뗐습니다.

수송관은 밖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얘기를 꺼냈습니다. “새로 전입 온 이등병이 죽고 싶다고 합니다. 보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대대장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서….”라면서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즉시 이등병을 대대장실로 불렀습니다.

K이등병은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 대대장실로 들어왔습니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K이등병의 손을 이끌어 소파에 앉혔습니다. 전입 왔을 때 이미 부모님과 통화를 했었지요. 먼저 차 한 잔을 건네며 ‘왜 죽고 싶은지, 어떤 애로사항이 있는지’ 좀처럼 입 열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를 차분하게 기다리며 설득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모님이 이혼을 한답니다. 집 걱정이 돼서….”라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병사를 달래서 보내고 가만히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지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O선생님! 일전에 통화했던 대대장입니다. 부모가 군에 간 아들을 걱정해야지, 어떻게 군에 있는 아들이 부모를 걱정하게 하십니까? 아드님이 ‘부모님이 이혼하려고 해서 죽고 싶다’고 합니다. 이혼하시려면 아드님 전역 후에나 하세요”라고 다짜고짜 따졌습니다. 아버지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대장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심려 끼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K이등병은 특별관리가 필요했지요. 마침 지휘관 차량 운전병이 전역 예정이어서 대대장 운전병으로 보직시키고 운전기량도 높이는 등 편애(?)했습니다. 또한 제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아내와 화해했고 이혼은 없던 일이 됐지요. K이등병은 주일에 대대장을 따라 자주 성당에 가곤 했습니다. 무교였던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하게 됐지요. 제가 이임할 무렵에는 세례를 받기 위해 정식으로 교리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병영 내 부조리와 가혹행위 때문에 강력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병영문화가 선진화되면서 병영 내 부조리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사고의 비중이 커지는 추세입니다. 군복음화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는 이유지요. OOO형제! 주님 안에서 은총 가득한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이연세(요셉) 예비역 육군 대령·동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