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뿐인 한지 14처, 청년들이 만들다

(가톨릭평화신문)
▲ 부산 사직본당 청년회 회원들이 본당 소성전에 봉헌한 십자가의 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세 번째 넘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머리의 가시관에서부터 흐른 피가 바닥에 흥건하고 얼굴을 덮은 크고 작은 상처에서 배어나는 선혈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적시는 듯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군중을, 아니 우리를 바라보는 그분의 눈에는 깊은 연민이 가득하다.

부산교구 사직본당(주임 김원석 신부) 청년회 ‘아니마또르‘(Animator, 신앙의 선구자) 회원들이 깊은 묵상과 나눔으로 제작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보는 이들에게 신앙의 울림을 주고 있다.

한지를 수백, 수천 번 오려붙여 질감과 입체감을 주어 채색한 작품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입체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김미경(에디트슈타인, 32) 회장은 “2017년 사순 피정 때 개개인이 십자가의 길 묵상글을 준비하다 각자의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묵상글의 느낌을 살려 우리만의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모여 14처 봉헌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여러 청년의 마음을 모았지만 2년 가깝게 진행된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십자가의 길을 한 처씩 맡아 작업했지만, 개인이 묵상한 내용을 다른 청년들과 나눴을 때 공감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십자가의 길 제작을 위해서는 깊은 묵상과 충분한 나눔이 필요했다.

최초희(엘리사벳, 30)씨는 “십자가의 길을 제작하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힐 때면 또 하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기분이었다”며 “그런 과정에서의 느낌과 서로의 묵상을 공유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말했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묵상이 깊어지자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지만 완성한 제3처가 채색 후 색이 번져 새롭게 제작해야 할 때는 크게 좌절했다. 청년들은 “마음속 십자가가 부러지는 느낌이었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서로를 격려하고 크고 작은 시련 속에 서로를 다독이며 작업을 이어졌다. 새벽까지, 때로는 밤을 새우며 완성한 십자가의 길 봉헌은 청년들에게 하나의 작품을 마쳤다는 것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오랜 본당 활동으로 식어버린 신앙의 불꽃을 다시 태우고 신앙생활의 재미를 되찾게 된 것이다.

그렇게 완성한 십자가의 길 14처는 지난해 12월 본당 소성당에 봉헌됐다. 사순시기 소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하는 신자들에게도 작은 신앙의 선물이 됐다. 십자가의 길이 매체에 소개되고 입소문을 타며 다른 지역에서 보러 오는 이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총무 김민주(제노베파, 28)씨는 “좁게는 사직성당, 넓게는 한국 교회에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알아가려는 청년들이 있다는 걸 많은 분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며 “십자가의 길이 보는 분들에게 마음에 와 닿고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