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세상 치유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연대

(가톨릭평화신문)
▲ 미국의 가톨릭 자선단체 신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도 나눔을 통해 사회적 우애를 발휘하는 모습. 【CNS】





2장 길 위의 이방인

프란치스코 교종은 슬픔과 고뇌, 기쁨과 희망이 교차하는 세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안에서 한 가닥의 빛을 발견하며 전진하기 위하여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들려주신 이야기 하나에 집중하도록 초대하신다. 그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루카 15,11-32)다.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쓰려져 있는데, 여러 사람이 그 앞을 지나지만 대부분 길 반대쪽으로 지나쳐 버린다. 유다인이 평소에 가장 멸시하고 상종하기도 꺼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가서 그 상처를 돌보고 여관까지 데려갔다. 그 길에 여러 사람이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고 자기 돈까지 내며 그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은 그를 위해서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주었다.

이 이야기는 상처투성이의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가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을 아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한 행동을 그대로 본받는 결단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길 위에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이를 내 삶에 포함시킬 것인지 제외시킬 것인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결단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차원에서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지나쳐버리는 방관자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고, 방관자도 되기 싫다면, 우리는 상처받아 쓰러진 사람이거나, 아니면 상처 입은 사람을 어깨에 들쳐업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에서 방관자들의 특징은 그들이 하느님 예배를 전문으로 하는 종교인들, 즉 사제와 레위인이었다는 점이다. 이 종교인들이 취한 선택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배하는 일만으로는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강도들과 지나쳐 가버리는 방관자들 사이에는 은밀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세상을 조작하고 기만하는 세력과 겉으로는 공명정대함을 코에 걸지만 실제로는 그 체제의 단물을 빨아 먹고 공생하는 세력과의 사이에 맺어진 동맹관계다.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소아적인 발상이다.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변화를 이루어갈 공동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일부터 하나씩, 사마리아인이 한 것처럼 당장 필요한 행동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더 넓은 지역으로, 국가로, 그리고 세계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혼자서는 어렵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을 협력자로 끌어들인 것처럼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을 끌어모아 힘 있는 가족을 만들어가야 한다.



3장 열린 세상 만들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을 만들어가고 발전시키고 완성에 이른다. 우리는 다른 인격과의 만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온전하게 인지하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과 참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을 알 수도 없다.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상대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자라난다. 여럿이 모인 집단도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경우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 보호적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사막 교부들도, 관상 수도승들도 여행객이나 순례자들에게 최대의 환대와 친절을 베푸는 것이 거룩한 의무였고, 자신들의 영적 정체성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방편이었다. 사랑은 보편적인 통공(universal communion)을 압박하며,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숨겨진 유배지가 있다. 장애인들은 아직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사회나 교회 안에서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참여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다고 느낀다. 노인들도 자신들의 풍성한 경험으로 공동선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자신들을 짐으로 생각한다고 느낀다.

이 시대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그룹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그룹은 자신들의 폐쇄적인 정체성을 저해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이들을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고 쓸모 있는 범위 안에 있을 때에만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람들의 이웃은 이웃이라기보다는 동업자이고, 특정한 이익만을 공유하는 파트너일 뿐이다.

형제애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뛰어넘는 더 높은 가치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절대화하는 개인주의는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도 평등하게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를 형제애에서 멀어지게 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도 막아버린다. 개인이 자신의 좁은 세계를 뛰어넘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연대’를 알아야 한다.

‘연대’의 가치는 학습과 양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연대’를 학습하는 가장 기초적인 현장은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가정이다. 또 가정을 넘어서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과 만나고 윤리적, 영성적, 사회적 연대를 양성하는 일은 학교의 교사들의 몫이다. 연대는 어쩌다 마음이 내킬 때 공감하거나 동참하는 정도가 아니다. 연대는 가난의 구조적 원인, 불평등, 일자리 부족과 싸우고, 주택, 노동 등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강우일 주교 제주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