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들의 사회교리] (35)조건 없는 자선

(가톨릭평화신문)
 
▲ 최원오 교수

 

 


“가난한 사람에 관하여 필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이처럼 행하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궁핍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선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궁핍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다면 하나하나 따지지 마십시오. 우리는 행실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보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덕행이 아니라 불행 때문에 그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자비를 받기 위해, 그리고 자격이 없는 우리 자신이 그분의 호의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동료 종들의 자격을 캐묻고 정확히 알아내려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동료 종들에게 어떻게 살았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 자신도 하늘로부터 오는 호의를 잃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도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마태 7,2)라고 하셨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에 관한 강해」 2,6. 하성수 옮김)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지 마라

기부자와 수혜자의 얼굴이 나란히 실린 기사는 슬프다. 하늘에 쌓을 보화를 사진 한 컷과 바꿔치기한 기부자들의 어리석음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기증식이나 기부 행사에 들러리를 서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는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지 말라”고 여러 작품에서 간절히 호소한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던 착한 목자 요한은 자선 행위로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모멸감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가난이 낙인이 되고 돈이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탈탈 털어 빈털터리임을 밝혀내기 전에는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이들에게 요한은 이렇게 되묻는다. “극장이나 아무 이로울 것 없는 모임이나 단체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잦고 수많은 사람을 헐뜯느라 바쁜 그대… 그대는 하루 종일 눈물로, 가엾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구걸하는 이를 판단하며 법정에 끌고 와서 시시비비를 따져달라고 요구합니까? 이런 일들이 인간답습니까?”(「자선」 24)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겨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에 길들어 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비정한 복지 행정의 사각지대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차마 세상에 손을 내밀지 못한 채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곱게 남겨 놓고서 세상을 버리는 수줍고 가난한 ‘송파구 세 모녀’들이 지금도 반지하 단칸방에서 절망적인 삶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선별하는 ‘헛일’ 대신,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재화를 배당받을 권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으로 돌려주라고 독려한다. “우리가 남의 삶을 조사하려 들면,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시의적절치 못한 참견질에 가로막혀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하며,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고 헛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이런 부적절한 호기심을 멀리 떨쳐내고, 필요한 모든 이에게 베푸십시오. 넉넉히 베푸십시오.”(「자선」 26)



최원오(빈첸시오, 대구가톨릭대 유스티노자유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