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젠더 감수성을 점검할 기회 / 박은미

(가톨릭신문)
지난 주일 미사를 드리고 나오다 지인 A(60대·여성)씨를 만났다. 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신다. 질문인즉슨 당신은 정치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만, 최근 국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 불편하셨단다.

“정치개혁 법안 패스트트랙(Fast track·안건 신속처리 절차) 상정을 두고 국회의원들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장이 한 여성 국회의원의 뺨을 만진 것에 대해 ‘성추행’이라고 비난하고, 같은 당 여성 의원들이 하얀 장미꽃을 들고 나와 국회의장을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역시 같은 당의 한 남성 의원은 여성 의원에게 ‘키가 작은 사람은 나름대로 열등감이 있다. 결혼도 포기하며 이곳까지 온 올드미스’라고 했는데 그 말에 대해서는 ‘자신을 위로하는 선한 표현’이라고 했다니, 뭐가 성추행이고 성추행이 아닌지 헷갈린다”는 말씀이었다.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성폭행 피해 고발 이후, 위계에 의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정치인과 유명인들이 줄줄이 법적 책임을 지게 됐고,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교구마다 성폭행 예방 교육이 진행되는 등 미투 운동은 교회 안팎의 시민들에게 젠더 감수성을 크게 고양하는 성과를 거뒀다. 약하고 소외된 지위에 놓인 경우가 많다 보니 미투 운동이 여성 피해자에 의해 선행됐지만, 미투는 비단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인간이 존재 자체로 존엄하게 존중받아야 함을 재확인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이제 누구나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국회 대치상황에서 ‘성추행’을 둘러싼 해프닝이나, “여성 당직자들을 대치 전면에 내세우라” 등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정치적으로 큰 권한과 책임을 지닌 사람들의 저열한 젠더 감수성과 여성 존재를 정치 도구화하는 사태에 심각한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태는 개인들에게는 A씨의 의문처럼 젠더 감수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며, 미투 운동의 성과를 퇴색시키는 일로 작동한다는 면에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투 운동은 가벼운 외침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싸우는 과정에서 이미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성폭력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있을 터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친부와 계부에게 신체적·성적 폭력을 당해 오던 12세 소녀가 폭력 사실을 누설하자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어머니는 남편이 무서워 딸을 보호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후회했다니, 안타까움을 넘어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이렇듯 성폭행 피해를 고발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데, 이번 정치권의 행태는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2차 가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젠더 감수성을 점검하는 일은 여성들에게도 요청된다. 동료 여성들의 심각한 성폭행 사건에 대해 줄곧 침묵하던 여성들이 이번 사태에 꽃을 들고 나선 것이나, 시위 최전방에 여성을 내세우라는 남성들의 요청에 거부 의사 한 마디 못하는 것을 보면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는 성경 말씀이 떠오른 건, 나만의 생각일까.

여성들 스스로 자기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면서, 마땅히 행해야 할 행동을 회피하거나 정쟁의 수단에 동원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미투 운동의 목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자. 바로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톨릭 내 성폭력을 공개석상에서 인정함으로써 세계적인 미투 운동 흐름에 가톨릭도 동참하고 있음을 천명하셨다. 가톨릭교회의 리더들과 모든 구성원들도 젠더 감수성 고양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야 한다.

※이번 주 ‘ 주말편지’는 쉽니다.


박은미(헬레나)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대표를 맡고 있으며, 주교회의 여성소위원회 총무와 품 심리상담센터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