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편지] 구룡공소의 봄날 / 금시아

(가톨릭신문)
신앙은 여러 곳에 출입구를 열어 놓는다. 그래서 누구든지 각자 자신이 찾아낸 입구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꽃들이 활짝 핀 봄, 어느 날 대구대교구 용성본당 구룡공소를 찾았다.

구룡공소 인근은 진달래가 눈부시게 만발해 분홍 꽃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숲은 사람의 발길이 닿은 것이 반가운지 자그마한 기척에도 바스락 바스락거렸다.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걷다 보니 그새 아담한 건물들이 몇몇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용성성당 구룡공소, 이곳은 천주교 신앙유적지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은 새것처럼 말끔하다. 햇살이 고즈넉하게 스며들고 있는 길 양쪽으로 녹슬고 기울어진 종탑과 허름한 피정 건물, 커다란 십자고상, 그리고 아담하고 단정한 구룡공소가 있었다.

조심스레 발꿈치를 들고 공소 안으로 들어 갔다. 의자도 없는 찬 마룻바닥에 할머니 한 분이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엎드려 계신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이 진달래 꽃빛으로 물들어 있다.

구룡공소는 여느 성전과는 조금 달랐다. 제단이 정면의 벽에 붙박이 돼 있어 신자들은 신부님의 등을 보고 미사를 올린단다. 또 어느 신부님은 신자들과 마주보고 마루에 앉아 강론을 하셨다니 그 모습은 ‘꽃동산’처럼 화사할 듯싶었다. ‘애긍함’이라는 참 독특한 이름의 봉헌함에는 ‘구룡공소 성역화 사업에 쓰인다’는 문구도 같이 쓰여 있다.

구룡공소 인근 동산의 큰 고상 밑에는 제비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꽃들은 저마다 작디작은 등으로 온 하늘을 받치고 있다. 십자가상과 그 둘레에 놓인 작고 낮은 돌들은 서로 동그랗게 이어져 묵주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십자가의 길은 시작돼 구룡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구룡산 정상에 다다르면 누구나 와락, 커다란 십자가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쏴쏴 밀물처럼/ 하얀 찔레꽃 들어온다// 은둔자들의 기도 진달래 군락을 이루던 한때도/ 모래시계처럼 빠져나가// 저런 귀한 손님이 없다// 느슨해진 성지의 신앙/ 중세의 가을처럼 기울어진 정오의 종탑 그림자/ 오래된 것들 위에서는 한낮도 낡아/ 조심스레 깨진 그림자를 거두는데// 사람이 썰물인 마을의 체온 하마 낮달인데// 누가 초대했을까/ 누가 입주하는가//저 눈부신 5월의 전략, 저 고독한 군중들’ (금시아 시인의 ‘5월의 전략’ 일부)

해발 675m 구룡산에 있는 공소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신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설립됐다. 그리고 온갖 박해와 큰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200여 년이 넘게 공소를 유지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어 왔다. 구룡공소는 그 오랜 역사와 부속건물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신앙유적지로 선포됐다.

한때 제법 분주했던 산마을에서 이미 사람은 썰물이다.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구룡산 꼭대기 마을엔 할머니 두 분만 산다고 했다. 개소리도 없이 조용한 마을, 녹슬고 바스러진 빈집 대문 앞으로 찔레넝쿨은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인적 없어 신앙의 발길 느슨해도 봄날의 성지는 진달래 군락을 이뤘고, 구룡공소는 봄빛 군중으로 충만해 있었다.

어느 봄날 내가 뜻밖의 출입구처럼 통과했던 적요한 성지의 시간들, 얼마나 눈부셨던가. 얼마나 평안했던가. 이 진달래꽃이 지면 하얀 찔레꽃 피어나고 나비들 나풀거릴 것이다. 구룡공소, 그 성지의 봄날은 늘 언제든 그렇게 깨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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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아(체칠리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