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차라리’와 ‘그래도’(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가톨릭평화신문)



후배 하나를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와인도 따라왔지요. 우리는 “좋은 저녁이야”를 연발하며 분위기 좋게 시작했습니다. 후배가 두 잔의 와인을 마시면서 이야기가 길어지더니 벌떡 일어나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게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시간은 좋은 대화가 핵심입니다. 좋은 시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을 잇는 연결고리 중 ‘차라리’는 여러 차례 한숨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차라리 돌아서고 말지!’, ‘차라리 헤어지고 말지!’ 등 인내를 시험하듯 ‘차라리’라는 말은 절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밥 먹다가 일어서지도 못하고 저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가지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차라리’를 ‘그래도’로 바꿔봐. 네 기분이 변하고, 생각도, 행동도, 지금 이야기도 조금 변화되지 않겠니? 너 힘든 거 알지만 차라리(里)보다 그래도(島)가 좀 경치가 좋을 것 같지 않아?” 후배가 너무 엉뚱했는지 강의하느냐고 대뜸 얼굴을 치켜들다가 이내 고개를 숙입니다.

“언니, 미안해요. 요즘 제가 너무 우울해서요.” 후배가 말하는 ‘차라리’를 너무 잘 알고, 너무나 많이 건너온 강이기에 저도 밥 먹다가 신경이 곤두섰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건너온 강은 ‘그래도’입니다. 내가 수천 번도 넘은 강이고 또한 누구나 건너오고 건너가고 있는 강입니다. 김승희 시인이 “그래도라는 섬에 살고 싶다”라는 시에서 ‘그래도’의 의미를 너무 잘 그렸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저도 늘 ‘~ 때문에’, 그래서 ‘차라리’를 연발하긴 했지만, 결국 제가 생의 가장 빛나는 도시를 찾은 건 ‘그래도’라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출발점이며 발견입니다. 언제나 희망의 공간입니다. 생은 높이뛰기였고 장애물 넘어서기이며 도전의 이름으로 땅을 넓히는 멀리뛰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후배에게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배의 도발적인 말과 행동 아래 깔려 있는 불쌍한 욕구를 제가 읽어 내지 못한 것 같아 선배로서 미안했습니다. 밥상 앞에서 우리는 침묵했고, 서로가 자신의 문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절반 남은 밥은 웃으며 먹을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정신이 약해지는 것인지 젊은 시절의 고통들이 불끈 일어서서 절 숨 막히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발끝에 힘을 주면서 스스로 서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금 둔감하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질책을 듣거나, 대화가 되지 않아 좌절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정신력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며, 위안이며,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저는 다시 감사합니다. ‘차라리’의 강에서 ‘그래도’의 강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바로 저의 기도의 힘임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