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침묵] 그분의 계획은 따로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소리로 표현된 선율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깊은 울림은 소리 너머에 있다. 저 아득한 태고의 침묵까지 담아내기에 소리는 역부족이다. 연주자는 소리를 통해 소리의 경계선에 이른다. 마침내 소리를 버리고 소리 없음에 귀의한다. 악기를 내려놓고 고요히 눈을 감는다.

화담 선생은 늘 줄 없는 거문고를 곁에 두었다. 그 무현금(無絃琴)에 한시를 남겼다. “무릇 소리를 듣는 것은 소리 없음을 듣는 것만 못하다(聽之聲上 不若聽之於無聲).” “음률은 귀로 듣지 않는다. 마음으로 듣는다(音非聽之以耳 聽之以心).”

무사에게 검은 곧 생명이다. 검으로 적을 베고 자신을 지킨다. 한 자루 검으로 승부에 나선다. 평생 검법을 수련한다. 좋은 검을 찾아 기꺼이 구한다. 그렇게 검을 아끼던 무사가 어느 순간 검을 버린다. 그는 검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보았다. 검은 보이는 것밖에 베지 못한다. 검으로 적의 목은 벨 수 있어도 그 마음을 벨 수는 없다. 적을 베고도 마음으로 질 수 있다. 이기고도 굴욕감에 시달릴 수 있다. 마음의 승부는 검법 너머에 있다. 무엇보다 그는 세상 승부의 하찮음에 눈을 뜬다. 승부 너머의 승부, 인생을 건 승부는 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검을 버린다. “나에게는 검이 없다. 검을 버림이 곧 나의 검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그러나 아버지는 알고 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란 걸. 파티를 즐기던 바로 그 밤에 졸지에 수재민이 되어 체육관 마루에 눕는다. 얼결에 살인을 저지르고, 지하 밀실로 숨어든다. 어느 하나 계획하지 않았다. 그래도 필연처럼 엮인다. “가장 완벽한 계획이 뭔지 알아? 바로 무계획이야.” 아들은 그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까. 영화는 아들의 독백으로 끝난다. “아버지, 저는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돈을 벌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 집을 사겠습니다. 아버지는 걸어서 계단을 올라오시기만 하면 돼요.” 관객은 알고 있다. 그 계획의 허망함을. (영화 ‘기생충’)

삶은 행선지를 모르는 열차와 같다. 우리는 두리번거리며 창밖을 살핀다.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 때쯤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 열차는 북쪽으로 가고 있구나. 따뜻한 남쪽 해변에서 멋진 일광욕을 즐기려던 나의 계획은 애초부터 허망했구나. 때늦은 회한이 스민다. “나의 날들은 흘러가 버렸고 나의 계획들도, 내 마음의 소망들도 찢겨졌다네.”(욥기 11,17)

계획은 인간이 세운다. 그러나 그 성사는 하늘의 몫이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우리는 그분의 큰 계획을 알지 못한다. 미천한 나를 주춧돌로 쓰실지 서까래로 쓰실지 헤아릴 수 없다. 용케도 그분의 뜻과 어긋나지 않은 계획이라면 작은 성취라도 맛볼 수 있으리라. 겸허히 기도하고 노력할 뿐이다.

두려워할 일은 없다. 그분의 계획은 따로 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그러므로 마지막 기도는 그분을 닮으리라.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벗이여, 얼마 전 물었지. “퇴직 후엔 무얼 하려나. 무슨 계획이라도 좀 세웠나.” 그땐 미소만 띠었지. 이제 말하려네. “별다른 계획은 없다네. 계획을 버림이 곧 나의 계획이네. 목표나 의지마저 버리려 하네. 이끄시는 대로 온전히 맡겨드림이 곧 나의 목표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