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미안, 엄마가 더 노력할게(장경희, 루치아, 장애인주일학교 자모회·서울대교구 명동본당)

(가톨릭평화신문)



“바보같이 그걸 왜 못해!”

아이가 제 눈을 빤히 봅니다. ‘아차, 또 말실수!’

제 속에 쌓아온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인 편견이 작동하는 데는 0.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무심한 말에는 날 선 반응을 하지만 정작 제가 내는 일상의 말을 깨닫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반성을 거듭하지만, 차별의 감각은 깊게 숨어 있다가 뜻하지 않은 순간에 튀어나옵니다. 제 아이는 자폐성 발달장애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며, 누구의 잘못으로 저렇게 태어났는지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아이의 장애가 제 탓이라는 죄책감으로 짓눌려 있을 때, 이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향한 죄의 무게를 덜고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이 잠잠히 가라앉고 난 후, 저는 ‘하느님의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미사 봉헌은 매주 겪어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입니다. 조용한 숲 속에서 갑자기 새가 울며 날아오르듯, 또는 잔잔한 호수 위에 느닷없이 던져진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문처럼 뭇 시선을 사로잡는 아이의 몸짓 때문입니다. 미사라는 거룩한 예식에서 아이의 행동은 얼마만큼 허용되는 것인지 매번 고민하곤 합니다. 때로 그러한 걱정을 하는 처지가 화가 나서 아이를 지나치게 다그치기도 하지요.

그러나 미사 내내 불편하던 저의 마음을 녹여내는 기적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 서로에게 건네는 평화의 인사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 행위는 서로가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이로써 저에게도 평화가 찾아오고 ‘하느님의 일’이 드러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 아이와 함께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모습과 처지,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장애인인 이 아이에게도, 이주노동자에게도, 난민에게도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와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동정과 연민을 넘어서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입니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 저는 종종 뿌리 깊은 차별의 언어로 아이를 속상하게 만들지요. 오늘도 눈과 귀와 입, 그리고 마음의 겸손을 청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