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당 주보성인] 성 최형 베드로

(가톨릭신문)

최형(베드로) 성인은 박해시기 여러 사제들의 복사로 활동하며 교회를 위해 헌신한 순교자다.

성인은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방제의 형이다. 교회사 안에서 최방제의 이름은 자주 들리지만, 박해시대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순교해 성인이 된 그의 형의 이야기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성인은 부모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해 생활했다. 수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만큼 제1대리구 동수원본당이 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있다.

1836년 입국한 모방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면서 그의 형인 성인을 복사로 삼았다. 성인의 재주와 신심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는 1839년 자신이 순교하기까지 성인과 동행했다. 성인은 사공 하나 없이 배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가 김대건 성인의 부제 서품식에도 참석했다. 김대건 성인이 부제가 돼 돌아왔을 때는 김 부제를 도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입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인은 틈틈이 신심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성인의 열성과 신앙심은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새 신자나 비신자까지도 성인을 찾아 복음을 전해 듣곤 했다. 성인은 전교회장은 아니었지만 베르뇌 주교에게 권한을 받아 세례를 주기도 했다.

성인을 신뢰했던 베르뇌 주교는 성인에게 출판기계를 맡기며 교회서적의 출판 책임자로 임명했다.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성인은 4년이나 교회서적을 출판하면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 수많은 책과 교회서적들을 출간했다. 성인은 문초 중 자신의 출판 활동에 관해 증언했는데, “「천주성교공과」를 처음 발간하니 4권 1질로 되었으며 3000여 벌을 박아 내었다. 또 「성찰기략」은 60여 장이 1권으로 된 책이나 1000여 권 박아 내었다”고 말했다.

밀고자의 고발로 체포된 성인은 서슴지 않고 자기 신앙과 활동사실을 자진해 고백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고발하는 포도청장에게 “나는 하느님 앞에 죄를 범한 일이 없다”면서 “그러나 국법을 어기는 행위를 했다면 그 법에 따라 내 마땅히 재판을 받을 것이오”라고 당당하게 맞섰다.

성인은 다리에 뼈가 드러나고 머리털을 잡아 매이는 등 잔인한 고문을 당했지만, 꿋꿋하게 신앙만을 증언했다. 성인의 순교 당시 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다른 모든 순교자들 중에서도 최 베드로는 가장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결국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신심서적을 출판했다는 죄, 다른 신자들의 거처와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인은 마침내 1866년 3월 9일 53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됐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