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구 절반 이상 사망… 장중하고 화려한 바로크 미술 탄생

(가톨릭평화신문)
▲ 흑사병에 지친 중세 유럽인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성당 안에서만큼은 천국을 맛보려 성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사진은 독일 바로크 성당을 대표하는 비스성당 제단.



전염병의 역습이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꺾이지 않고 기승이다. 홍역, 인플루엔자, 발진티푸스, 말라리아 등 다양한 전염병들이 인류를 괴롭혀 왔다. 14세기 아시아에서 발생한 흑사병이 중세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감소시켰다. 또 16세기 유럽인들이 퍼뜨린 천연두는 당시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의 몰살시켜 잉카 문명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처럼 전염병은 인류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큼 위협적이다. 다행히 오늘날 의학의 발전과 다양한 예방책으로 전염병이 인류 전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을 가능성은 적어졌다. 하지만 전염병은 여전히 전쟁과 기근과 함께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바꿔놓는 교차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세 시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 당시 교회와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간략히 정리했다.



▨ 흑사병

흑사병은 페스트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에서 나온 말이다. 흑사병은 성경에도 낯설지 않게 언급된다. 구약성경에서 흑사병은 칼이나 전쟁, 굶주림, 사나운 짐승과 함께 하느님의 재앙으로 표현된다. 특히 인구 조사로 하느님께 죄를 범한 다윗은 3년 동안 기근이 들게 하는 벌, 전쟁이 나서 적들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는 벌, 온 나라에 흑사병이 퍼져 백성을 파멸시키는 벌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때 다윗은 흑사병을 택해 백성 7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2사무 24,14) 또 복음서와 요한 묵시록 역시 종말에 관한 하늘의 표징으로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할 것(루카 21,11; 마르 13,7-17; 묵시 6,1-7)이라고 경고한다.

흑사병이 인류 역사상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6세기 독일과 동로마 제국에서 흑사병이 창궐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2015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연구진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기원전 2800년대) 유골 DNA에서 페스트 병원균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흑사병은 14세기 중세 유럽과 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에 창궐해 “역사를 바꿨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숫자로는 약 2천500만에서 6천만 명에 이르는 유럽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 전체 인구는 7000만~8000만 명이었다.

흑사병은 1300년대 초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시작해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전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 곳곳에 퍼져 나갔다. 흑사병은 유럽을 휩쓸기 전 몽골과 중동의 이슬람 제국을 강타했다. 흑사병으로 1300~1350년대에 중국 원나라 인구의 30%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흑사병이 유럽에 발생한 것은 1347년이다. 그해 흑해 북부 연안 항구 도시로 제노바의 식민지인 카파를 포위한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이들을 석궁에 매달아 도시 내부로 날렸다. 포위를 피해 도시를 탈출한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해안 도시를 통해 페스트균을 서유럽 전역에 옮겼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들이 흑사병을 옮겨 왔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도시는 텅 비었고, 마을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공기가 좋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집을 짓고 촌락을 이루었다. 민심도 흉흉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다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흑사병을 퍼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 곳곳에서 유다인 집단 학살이 자행됐다. 이에 클레멘스 6세 교황(재위 1342~1352년)은 1348년 9월 교서를 통해 유다인을 향한 의심과 증오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으나 민중의 폭력적인 혼란을 저지하지 못했다.

1347년에 시작된 유럽의 흑사병은 절정기가 지났음에도 18세기까지 반복적으로 발병했다.



▨ 흑사병이 중세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완전히 바꾸었다. 인구가 줄자 농촌은 황폐해졌고, 세금을 거두지 못한 영주도 덩달아 타격을 입었다. 그러자 영주들은 수입을 보존하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에게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부과했다. 결국,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135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농민반란은 영국, 이탈리아로 퍼졌다. 그 결과 중세 봉건 제도를 유지하던 농노제도가 허물어졌다.

또 농민과 자유민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늘어나 도시 귀족 계급을 새롭게 형성했다. 이는 영주들의 세력을 약화하고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해 유럽에 왕정 시대를 여는 발판이 됐다.

흑사병은 중세 교회의 권위도 크게 떨어뜨렸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발판으로 굳건히 서 있던 교회의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흑사병으로 성직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 중세인들은 더는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지켜줄 의술과 과학, 이성에 매달리기 시작해 인문주의를 발전시켰다. 이런 혼란기를 틈타 프랑스의 필리프 4세 국왕은 교황을 아비뇽에 유수시켜 교황의 권위마저 떨어뜨렸다.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대립 교황들을 거듭 내면서 세 명의 교황이 선출되는 분열을 자초했다. 이를 ‘서구 대이교’ 사건이라고 한다.



▨ 흑사병 이후 생겨난 신심과 교회 문화

흑사병이 창궐한 1347년 이후 중세 유럽은 200여 년간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과 흑사병, 가톨릭과 개신교 분열로 인한 30년 전쟁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중세인들은 지옥 같은 현세에서 벗어나 성당 안에서만큼은 천국을 맛보려 했다. 그래서 성당에 들어서는 모든 이가 압도될만큼 장중하고 화려하게 성전 내부를 장식했다. 바로 바로크 미술의 효시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자신들의 신앙심을 고백하기 위해 최후의 심판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장면, 천국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복을 누리는 광경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흠숭하는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흑사병은 또한 신비주의 영성과 순례 영성을 발전시켰다. 14세기 도미니코회 수도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1329) 신부는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면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과 합일을 이룰 수 있고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 본성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도미니코회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흑사병 창궐로 사회와 교회가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는 가운데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영성 생활을 모범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그리스도와 마리아 및 성인들에 대한 환시를 자주 체험하면서 병자를 돌보는 일을 즐겨했으며, 그레고리우스 11세 교황을 설득해 아비뇽에서 로마로 귀환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례길에 올랐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했던 성인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 성인 유해 공경 신심도 키워나갔다. 또 마을 주민 전체가 주님의 수난극을 연출하면서 흑사병에서 해방되길 기도했다. 이러한 전통은 독일 남부 티롤 오버암버가우 마을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이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준주성범」을 저술해 세속의 물질과 향락을 좇지 말고 참행복을 추구하라고 가르쳤다. 「준주성범」은 가톨릭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