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하고 사랑 많은 ‘인천 깍쟁이’ 41년간 인천교구 성장 이끌어

(가톨릭평화신문)
▲ 나길모 주교가 2011년 답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주교수품 금경축 미사에서 문기득 인천교구 평협 회장에게 예물을 받고 있다.

▲ 나길모 주교(오른쪽)가 2002년 답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제2대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 착좌식에서 최 주교와 주한 교황대사 바티스타 모란디니 대주교(왼쪽)와 기도하고 있다.

▲ 나길모 주교가 2002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송별미사를 봉헌하고 신자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 1994년 인천교구 작전동본당 새 성전 축복식에서 성수를 뿌리고 있는 나길모 주교.



6ㆍ25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28세 젊은 미국인 선교 사제가 한국 땅을 밟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16일 항해 끝에 닿은 부산항. 그가 처음 마주한 광경은 부두를 채운 환영 인파였다. 환대 속에서 그는 다짐했으리라.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교회를 재건하겠노라고. 그런데 이때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초대 인천교구장이자 한국 교회 사상 최장 재임 교구장이 될 줄을. 4일 선종한 메리놀 외방선교회 출신 윌리엄 존 맥노튼(William J. McNaughton), 한국명 나길모(굴리엘모) 주교 이야기다.

나 주교는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주도 보스턴 근교 작은 도시다. 아일랜드인과 이탈리아인, 프랑스계 캐나다인 등 가톨릭 문화권 출신이 특히 많이 정착한 곳이다. 자연스레 로렌스는 가톨릭 교세가 강한 도시가 됐다. 유일한 사립고교도 마리스타 교육 수사회가 세운 센트럴 가톨릭고등학교였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나 주교도 1944년 이곳을 졸업했다.



전쟁 직후 한국 땅 밟은 젊은 사제

나 주교는 같은 해 메리놀 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뉴욕 메리놀 대신학교에서 학부와 신학원을 마치고 종교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6월 사제품을 받았다.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였다. 한국 선교를 결심한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1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메리놀회 선배들이 늘 이야기했던 한국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청년 나 신부는 기대를 안고 부산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첫 소임지는 충청북도 감목대리구(현 청주교구)였다. 당시 메리놀회가 서울대목구로부터 사목을 위임받은 곳이다. 초대 청주교구장이자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이던 제임스 파디(야고보) 주교는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일제에 쫓겨나기 전까지 의주에서 7년간 사목했던 인물이다. 어렵사리 돌아온 만큼 그는 교회를 재건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뜨거운 선교 열기 속에서 나 신부는 장호원(현 감곡)본당 보좌로 첫 사목을 시작했다. 이어 북문로(현 서운동)본당 보좌와 주임, 내덕동본당 주임을 거쳤다. 또 교구 참사와 부감목을 지냈다.

1961년 6월 인천대목구(현 인천교구)가 설정됐다. 청주 부감목이던 나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됐다. 그해 8월 주교품을 받았다. 34세 되던 해 일이다. 주교 서품식은 고향 로렌스의 성 마리아성당에서 거행됐다. 보스턴대교구장 리처드 쿠싱 추기경이 주례했다. 사목표어는 “UT OMNES UNMM SINT”(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요한 17,21) 문장은 국화 무궁화, 한국 주보성인 성모 마리아, 한국 교회 첫 사제 성 김대건 신부, 그리고 인천 항구를 담았다. 1년 뒤, 한국 교회 교계제도 설정으로 인천대목구가 인천교구로 승격하면서 나 주교는 초대 인천교구장에 착좌했다. 그리고 41년 동안 봉직했다.



전철 타는 주교님

인천교구장 재임 시절 나 주교는 ‘전철 타는 주교님’이라고 불렸다.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붙여진 별명이다. 또 아침에 먹다 남은 수프를 저녁에 데워 먹을 정도로 검소했다. 오랜 세월 사목 동반자였던 고 김수환 추기경은 나 주교를 ‘매번 전철을 타고 서울로 오는 정말 겸손한 분’이라고 평했다.

아낄 줄 아는 만큼 베풀 줄도 알았다. 나 주교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전국 최초로 신자들의 밀린 교무금을 탕감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성당을 못 나오는 신자에게 은총과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나 주교는 근면 성실한 분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나 주교는 단 한 번도 주교회의에 결석한 적이 없었다. 맡은 일에 항상 충실하셨던 분”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나 주교는 주교회의 총무를 시작으로 전례위원장, 일치위원장, 교리교육위원장 등 40년간 주교회의 주요 직책을 두루 지냈다. 그 성실성은 로마에서도 빛났다. 나 주교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전 회기에 개근했다. 몸이 몹시 아팠던 단 이틀을 제외하고 말이다.

나 주교가 근검절약 정신으로 교구를 운영해왔지만, 살림살이는 늘 팍팍했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데다 교구 교세도 크지 않았다. 1961년 교구 신설 당시 본당은 9개, 신자는 2만 3000여 명에 불과했다. 나 주교는 공업지역 인천이 가진 인구 잠재력을 믿었다. 땅을 사고 성당을 짓는 데 공을 들였다. 선견지명이었다. 나 주교 재임 마지막 해, 인천교구 본당은 85개, 신자는 37만 2000여 명에 달했다.



은퇴 후 부모님과 약속 지키려 미국으로

나 주교는 2002년 4월 인천교구장 직을 사임했다. 부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신임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나 주교는 은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남아 달라는 신자들 애원에 이렇게 답했다. “5남매 장남이었지만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어요. 은퇴 후에는 고향에 돌아오라는 어머니 유언을 꼭 따르고 싶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나 주교는 고향 근처 메수엔이라는 소도시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인천교구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한인 사목에 힘썼다. 사제 수품 60주년도 보스턴 한인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기렸다.

나 주교는 인천교구를 잊지 못했고, 교구도 그를 잊지 못했다. 교구 초청을 받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사제 수품 50주년인 2003년. 그리고 주교 수품과 인천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은 2011년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나 주교는 말했다. “인천교구 가족들이 가장 그리웠노라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도 그는 벅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TV로 지켜봤다. 마음만은 스크린 너머 신자들과 함께 있었으리라.

나 주교가 이 땅에 심은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 결실을 보았다. 인천교구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신자 수(51만 7000여 명)가 많은 교구가 됐다. 본당은 127개, 사제 수는 340여 명에 이른다. 복음화율(11.7%)도 전국 세 번째다.

스스로를 ‘인천 깍쟁이’라고 부른 나길모 주교. 그는 참된 선교사였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