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 속 압록강변 강제 행진… 죽음으로 표적 남긴 순교자들

(가톨릭평화신문)
▲ 서울에 집결한 포로들은 평양을 거쳐 만포진으로 이동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다. 그래픽=장희원



남한 지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포로가 된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미군과 외교관 등 700여 명은 만포를 지나 고산과 초산, 중강진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행군한다. 1950년 10월 하순에서 11월 중순 사이, 이들은 한국에서 가장 험악한 지역인 압록강변의 산길을 가로질러 280㎞를 걸어갔다.

한편, 전쟁 이전부터 옥사덕수용소에 갇혀 있던 덕원수도원과 함흥대목구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10월 23일 북행을 시작, 만포와 관문리수용소를 거쳐 이듬해 1월 옥사덕수용소로 돌아오는 죽음의 여정을 떠난다.

간수들의 잔인함,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는 굶주림에 의약품마저 없었다. 수많은 포로와 성직자, 수도자들이 북을 향해 가던 길에 사망했다. 죽음의 행진이라는 명칭이 붙은 까닭은 행진 도중에 죽은 이들이 자기 죽음으로 그 길에 표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동토에서 하늘까지」 중)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지는 목자들

“죽을 때까지 행진을 시키시오! 그게 군의 명령이오.”

서울과 춘천 등지에서 공산군에 체포된 사제와 수도자들은 7월 말 평양으로 끌려간 뒤 두 달 후 만포에 도착했다. 죽음의 행진 내내 굶주림과 공산군의 위협으로 공포에 시달렸다. 더욱이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공산군 소좌는 병들거나 팔순이 넘은 포로들까지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서울에서 체포된 주한 교황 사절 패트릭 번 주교와 춘천지목구장 토마스 퀸란 몬시뇰, 필립 크로스비(조하선)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초대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 등 수도자들도 힘겹게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다. 간수들은 “빨리빨리”를 미친 듯이 반복하며 포로들의 걸음을 재촉했다. 호랑이는 낙오하는 이들의 뒤통수에 방아쇠를 당겼고, 가장 많은 낙오자를 내는 반의 반장인 미군 장교도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

어느 날, 미군 포로 한 무리가 행진이 잠시 멈춘 시간에 번 주교와 사제들에게 다가와 고해성사를 받기를 청했다. “제 이름은 로스이고 가톨릭 신자입니다. 고해성사를 받고 싶어하는 가톨릭 청년들이 많습니다.” 번 주교는 “행진이 다시 막 시작될 때 한꺼번에 죄를 사해 줄 것”이라며 “신자들은 반드시 사죄경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해성사는 신자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이었다.

사제와 수도자 중 몸이 조금이라도 건강한 이들은 병든 이들을 부축하며 행진을 이어갔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베아트릭스 관구장 수녀 상태가 가장 좋지 않았다. 행진 3일째 오후 그는 동반자인 으제니 수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로 쳐지기 시작했다. 공산군은 으제니 수녀를 관구장 수녀와 강제로 떼어 놓았다. 11월 3일 기진맥진한 베아트릭스 관구장 수녀는 중강진 부근에서 총살당했다. 76세였다.


▲ 죽음의 행진에서 순교한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초대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의 순교를 조형화한 작품.



죽음의 상징이 된 인민병원

행진이 계속될수록 죽음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포로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몸은 해골처럼 변했고, 탈진해서 길가에 쓰러진 포로들을 지나칠 때면 어김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호랑이가 말하는 병자들을 위한 ‘인민병원’의 뜻을 일행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11월 8일 중강진에 도착할 때까지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포로들은 중강진에서 일주일, 하창리에서 130여 일 동안 머물렀다. 행진과 그 후유증으로 200명이 넘는 포로들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팔순이 넘은 파리외방전교회 폴 비예모 신부는 신자들이 주위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는 가운데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선종했다. 그리고 다음날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숨졌다.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는 “형이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나를 불러 줘!”라는 말로 형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형의 부름이었을까, 동생 신부도 다음날 형의 곁에 묻혔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900년 함께 서품을 받은 형제는 지상에서의 여정도 함께 마쳤다. 18일에는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초대 원장 마리 메히틸트 수녀도 마지막 숨을 거뒀다.

살아남은 일행 역시 산목숨이 아니었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다음 차례는 자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프랜시스 캐너밴 신부는 뇌막염 증세를 보였고, 웃음을 잃지 않고 주변 이들을 돌보던 번 주교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건강 상태가 악화됐다. 번 주교는 11월 25일 하창리의 한 시골집에서 선종했다. 그는 퀸란 몬시뇰에게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늘 내 소원이었는데 좋으신 하느님께서 내게 이런 은총을 주셨다”는 말을 남겼다.



미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행진은 멈췄지만, 영하 30℃를 넘나드는 하창리에서의 겨울나기는 죽음만큼 고통스러웠다. 포로들은 땔감을 구해 밥을 짓고 불편한 동료들을 간호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주님 성탄 대축일쯤 기쁜 소식이 들렸다. 죽음의 사신 ‘호랑이’가 다른 발령지로 떠난 것이다. 더욱이 새로 부임한 수용소 소장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미군에 대한 구타도 사라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도 조금씩 옅어졌다.

일행은 다시 1951년 3월 말 안동리 수용소로 옮겨져 6개월간 좀 더 나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처우가 조금 나아진 것은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유엔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사이에 휴전 회담이 영향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1951년 10월 초 트럭을 타고 만포로 이송됐다. 트럭에서 보는 익숙한 풍경, 이 길을 걸어가며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는데 되돌아가는 일행의 머릿속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만포를 거쳐 운장에서 수용생활을 하며 세 번째 겨울을 넘기며 끝이 나지 않은 것 같은 포로 생활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1952년 3월 퀸란 몬시뇰 등이 수용소에서 평양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4월 미국인들도 수용소를 떠났다. 그들은 평양을 거쳐 소련 정부 대표자에게 인계되어 각자의 나라로 보내지며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옥사덕수용소에 갇힌 수도자들은 1954년 1월 초까지 억류됐다가 자유를 얻었다.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 24명이 사망하고, 42명만이 생환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공산군에 대한 지독한 미움이 싹 텄을 만도 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군중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던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자신을 박해하던 공산군을 바라봤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더 중요하고 귀중한 자유를 얻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을 자유이고, 나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할 자유이다… 살아서 우리와 함께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을 찾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남지 못한 사람, 잡힌 사람과 잡은 사람, 그들의 우상, 그들의 호랑이도 그분과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중 아무도 그분을 뵙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소서!” (죽음의 행진 생존자 크로스비 신부의 회고록 「기나긴 겨울」 중)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