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피와 선교사의 땀, 성모신심으로 일군 믿음의 교회

(가톨릭평화신문)
▲ 1544년 만나르 섬 순교자들을 새긴 대리석 부조가 순교자의 모후 성당 입구에 걸려있다.

▲ 마두 성모자상이 중앙 제대에 모셔져 있다.

▲ 순교자의 모후 성당 마당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안장한 무덤이 있다.

▲ 1872년 완공, 1944년 축성된 마두 성모 성당 전경

▲ 한 신자가 마두의 성모에게 전구를 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가톨릭 벨트’를 따라 북쪽으로 300km 올라가면 만나르교구(교구장 에마누엘 페르난도 주교)가 나온다. 만나르교구는 인도와 가까워 대대로 인구 유입이 많은 지역이다. 교구민 80%도 남인도에서 온 타밀족이다. 외지인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민족ㆍ종교 간 충돌도 잦았다. 만나르교구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 전쟁과 화해의 역사였다.

만나르=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순교자의 섬 만나르

1544년 10월, 만나르 섬에서 스리랑카 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폭군 칸킬리 1세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신자 600~700명을 학살했다. 희생된 이들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힌두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어민들이었다.

순교자의 섬 만나르로 가는 길 곳곳엔 무장 군인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상할라족이 주류인 스리랑카 정부군과 26년간 전쟁을 치른 타밀족 땅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칸칼리 1세의 박해 현장인 토다벨리는 섬 동쪽에 자리한 평온한 시골 마을이다. 박해의 현장에는 조그만 성당이 하나 있다. ‘순교자의 모후 성당’이다. 마당에는 작은 정원처럼 꾸며놓은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또 성당 안에도 순교자들의 유해함이 있다. 주임 바즈 신부는 “무더기로 발굴한 순교자 유해를 수습해 2개의 무덤에 안장했다”며 “아이 유골도 많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무덤에도, 유해함에도 순교자 이름은 단 한 명도 나와 있지 않았다. 기록이 없는 까닭이다. 당시 박해를 다룬 사료는 유럽 선교사들이 주고받은 서신이 전부인데, 그 안에는 인명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듯 성당 입구에는 하비에르 성인과 순교자들을 정교하게 새긴 대리석 부조가 걸려 있었다.

만나르 섬 순교자들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됐다. 그 씨앗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과 요셉 바즈 성인 등 선교사들이 뿌린 땀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랐다. 현재 만나르교구의 지역 복음화율은 24%로 전국 교구 중 두 번째로 높다. 이는 스리랑카 교회의 전체 복음화율 7%보다 3.5배 높은 수치이다.

만나르교구와 스리랑카 교회는 해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 2019년에는 만나르 섬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475주년을 맞아 순교자의 모후 성당에서 현양 행사를 크게 열었다. 전국 주교단과 주스리랑카 교황대사도 참여했다.

스리랑카 교회는 만나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 중이다. 만나르교구장 에마누엘 페르난도 주교는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 추진 자료를 제출했지만, 아직 회답이 없다”며 “사료가 너무 부족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페르난도 주교는 “한국에 성인이 103위나 있다는 게 놀랍다”며 “시복시성과 관련해 한국 교회에 많은 도움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박해의 고통 위로해준 성모자상

1670년,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가톨릭 신앙 금지법’을 내세워 교회를 박해했다. 해안 도시 마타이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성모자상을 모시고 정글 한가운데로 피신 왔다. 그리고 그곳에 경당을 세워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했던 스리랑카 교회 첫 성인인 요셉 바즈 신부와 다른 지역 신자들도 성모자상을 통해 박해의 고통을 위로받고자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조성된 곳이 바로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스리랑카 교회의 최대 순례지이자 성모 신심 중심지, 마두 성모 성지이다.

마두 성모 성지에는 지금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마두의 성모 축일인 7월 2일과 성모 승천 대축일인 8월 15일에는 50~60만 명이 몰린다. 성지는 순례자를 위한 성당과 피정의 집을 갖추고 있다. 성지 규모는 방대하다. 성지 입구에서 마두 성모 성당까지 11㎞나 떨어져 있다. 성지 입구에서 마두 성모 성당까지 차로 10분 넘게 달렸다. 차창 너머 끝없이 펼쳐진 열대 우림으로 ‘이 길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세워진 성지 성당의 외벽은 희고 푸른 대리석으로 장식돼 인상적이다.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M’자가 새겨진 고딕교회 건물 모양 성당 제단 위에는 마두의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다. 60cm 크기 목각 성모자상은 별이 달린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가 꽃문양 장식이 들어간 흰 망토를 걸친 채 왼손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은 무릎 기도를 하면서 성모자상 앞으로 나아간다.

성당 한쪽에 파인 직사각형 모양 구덩이에도 신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그 안에서 흙을 퍼 봉지에 담고 있었다. 성지 담당 페피 신부는 “17세기 성 요셉 바즈 신부가 미사를 봉헌한 땅에서 퍼온 흙”이라고 설명했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이 벌인 스리랑카 내전(1983~2009) 동안 마두 성모 성지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 매년 1만 명이 넘는 싱할라와 타밀, 두 민족 신자들은 피란과 순례를 위해 성당을 찾았다. 이에 유엔 난민기구는 1990년대 성지를 중립지대로 설정하고 군사 행위를 금지했다. 덕분에 1만 5000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 말기 포격으로 40명이 죽고 성모자상을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성지는 26년 동안 피난처 역할을 굳건히 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순례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성지를 찾은 교황은 소수민족 차별과 내전 후유증을 겪고 있는 스리랑카에 평화와 화합, 치유가 깃들기를 기도했다.

교황의 바람대로 마두 성모 성지에선 타밀족과 싱할라족 순례자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미사도 두 민족 말로 번갈아 봉헌된다. 페르난도 주교는 “마두 성모 성지가 평화의 상징이 되기까지 순교자 바스티안 신부와 란지스 신부의 공도 크다”고 했다. 이들은 내전 당시 목숨을 걸고 양 떼를 보살핀 타밀족 사제들이다.

“바스티안 신부는 난민을 돕다가 반군으로 오인돼 싱할라족 군인에게 사살돼 순교했죠. 란지스 신부는 구호물품을 옮기다가 지뢰를 밟아 선종했습니다. 우리 교구는 두 사제의 선종 기념일마다 이들을 추모하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