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혼 되찾아야 인간도 피조물도 산다

(가톨릭평화신문)
▲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 감염병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 안에 서식하는 바이러스들을 만남으로써 생긴다. 코로나19 사망자가 1만 명 넘게 발생한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의 한 묘소에서 보호 마스크를 쓴 장례사가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CNS】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 매일 늘어나는 사망자 숫자를 보면서 그것이 내 문제일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렵다. 갈수록 더 큰 두려움이 매일 자라고 있다. 정부와 국민은 전에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이 신종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질병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실 인류 출현 후 지금까지 인간은 이렇게 낯선 것들과 격렬하게 싸워왔다. 이처럼 질병과 질병으로부터 오는 고통은 어느 한정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병에 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매일 병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에는 대부분 병으로 죽게 된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우리 또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거대한 질문 앞에 서보면 어떨까.

질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니면 질병은 우리 삶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어쩌다 운 없이 생긴, 의미나 목적이 없는 불행한 것인가? 질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회복에 도움이 되는가? 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씨름한다. 하느님 권능이 세상에 드러난다고 할 때, 이 권능과 질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병에 걸릴 때 하느님께서는 관심을 두고 보시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면역 체계가 계속해서 아주 빠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바이러스, 박테리아, 암세포를 퇴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화학적 전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몸에 방어력이 없으면 AIDS 같은 면역 결핍증에 걸리듯, 이러한 공격자들은 재빠르게 우리 몸에 침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두 가지 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병은 아주 가까운 이웃처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현대 문화 안에서 우리는 건강을 지향하고, 질병에 대해 몹시 두려워하며 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건강한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때때로 병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문제가 대두한다. 치유는 몸과 정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영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가 궁극적 치유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믿음이다.



물질 만능주의가 불러온 바이러스 감염병

그러나 현대 사회는 영혼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물질 만능주의, 경제 중심 사회에서 인간은 경제적 유익을 위해서 자연에 속한 피조물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가 결국에는 인간 파괴로 돌아온다. 현대 사회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 감염병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영역 안으로 들어가 동물 안에 서식하는 바이러스들을 만남으로써 생긴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탐욕이 인간 서로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일어난 것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200년에 걸쳐 산업 문명은 공기, 토양, 바다, 화학 작용, 물의 순환, 그리고 열 균형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가차 없이 훼손시켜 왔다. 지구의 중요한 생명 체계를 파괴하고 있다. 생태 위기는 경제적, 인종 간의, 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결합하여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로 뒤얽혀 있어 얼핏 보아선 알 수 없는 이러한 재앙은 개개인의 발달을 크게 망가뜨리고 있다. 서구화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지혜로운 노인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인류 초기의 자연과의 친밀감이나 개개인의 독특한 특성, 곧 혼(soul)과 멀어진 채 우리 삶은 멀리 표류하고 있다.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교육적이고 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구에서 행해지는 인간 활동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은 고통 겪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인간도 살고 다른 피조물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 몸이 치유되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내면의 존재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의 지혜로운 선조들은 영혼과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였고, 영혼을 돌보거나 배려해 왔다. 영혼을 돌보라고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부와 명예와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지혜와 진리를 찾고 영혼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영혼에 대해 강조한 예수님 말씀이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잘 가꿔진 정원에서 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는 것처럼 영혼도 잘 돌봐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야 영혼의 믿음이 성장하고 치유의 근원인 내면의 중심을 향하게 된다.

인간은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지구 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깨달아 왔다. 심리적 통찰력과 영적 깨달음은 고통 없이는 거의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삶이 온전히 변화되었다(갈라 2,19 참조)고 말한 부분에서 잘 볼 수 있다. 모든 고통이 영적, 심리적 성장으로 이끌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 깨달음은 고통을 통해서 온다. 절망 속에서 느낀 고통도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에 의해 지혜로 변모된다.

▲ 문종원 신부(서울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