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12) 흥남 철수와 하느님의 종

(가톨릭평화신문)
▲ 거제항에 도착한 빅토리호. 한 신앙인의 결단으로 1만 4000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수세에 몰린 한국군과 UN군은 1950년 12월 15~24일 흥남부두에서 193척의 선박을 타고 남쪽으로 철수 작전을 개시한다.

12월 22일, 흥남부두에 남은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떠날 채비를 마쳤지만, 레너드 라루(Leonard RaLue, 1914~2001) 선장은 부두를 보며 고뇌에 빠졌다. 부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밀려들고 있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아직 배에 타지 못한 수만 명의 피란민은 군함에 오르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적에게 쫓겨 군수물자만 챙겨 매우 급하게 부두를 떠나야 하는 상황. 결심을 내린 라루 선장은 선원들에게 망설임 없이 지시를 내린다. “군수품을 모두 버리고 피란민을 배에 태워라.” 배에는 이미 군수물자 25만 톤이 실려 있어 피란민을 태울 여유가 없었던 터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절망 가득한 흥남부두에 한 송이 꽃처럼 기적이 피어난 것이다.



기적의 배 빅토리호

선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피란민들이 배에서 내린 그물 사다리에 기어올라 승선하기 시작했다. 군수품이 비워진 화물칸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갑판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안도의 숨을 내 쉬었지만 살았다는 기쁨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거의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김영숙(예수성심전교수녀회) 수녀는 본지 인터뷰(2015년 1345호 12월 25일자)를 통해 “15살 때 어머니, 오빠들과 함께 빅토리호를 탔다”며 “기적 소리가 울리면서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피란민들은 멀어지는 고향 땅을 보며 엉엉 울었다”고 전했다. 1만 4000여 명이 이날 목숨을 건졌고, 배에는 훗날 사제와 수도자가 된 이들과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의 부모도 타고 있었다.

피란민들에게 나눠줄 물과 식료품은 물론이고 의사와 통역관도 없었다. 살을 에는 듯한 영하의 추위였지만 화물선이라 난방 시설과 화장실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도 새 생명이 태어났다. 항해 첫 날밤 건강한 사내아기의 울음소리가 적막 가득한 배에 울려 퍼졌다. 이후 3일간의 항해 중 4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다. 선원들은 첫 번째로 태어난 아기를 ‘김치’라고 이름 지었고, 이후 김치 2·3·4·5도 세상에 나왔다.

‘김치5’ 이경필(야고보)씨는 배어서 태어난 이후 장승포에 자랐다. 그는 “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 보름 뒤 다시 오겠다고 하고 배에 올랐지만,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됐다”며 “생각해 보면 태어난 것도, 죽지 않은 것도 기적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배는 3일 동안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선원들은 피란민들이 그 엄청난 추위 속에서 3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미 10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들어서 부두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부산에서 식료품과 보급품을 받은 빅토리호는 부산을 떠나 방향을 거제도로 잡았다. 12월 25일 주님 탄생 대축일, 마침내 1만 4000여 명의 피란민들은 거제도에 안전하게 내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라루로 태어나 마리너스로 선종하다


죽음의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건진 피란민들과 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라루 선장<사진>은 항해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노아의 방주에는 그의 가족들이 탔지만 라루 선장의 배에는 1만 4000여 명이 탔다. 노아는 가족 외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기적의 배」 중) 하지만 당시의 선원들은 “애초 그 배에 1만 4000여 명을 승선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며 “3일간의 성공적인 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장의 확고한 신앙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빅토리호는 민간 해운회사 소속 화물 수송선이었다. 휘발유와 비행기 연료를 흥남 인근 미군 비행장에 수송하는 게 임무였지만 이미 미 해병대마저 흥남을 철수한 상태였다. 라루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미국에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흥남부두의 피란민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뀐 것이다.

라루 선장은 흥남철수 4년 뒤인 1954년 22년간의 해상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 성 베네딕도회 뉴튼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자가 됐다. 마리너스 수사는 병 치료를 제외하고 46년간 수도원 밖을 나선 것은 하루뿐이었다. 1960년에 정부에서 주는 표창을 받기 위해 수도원 밖을 나선 것이 그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해양 화물 선박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갤런트 쉽’(Gallant Ship)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조그만 선박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는지 자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때마다 한 가지 분명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깨닫습니다. 내 배가 줄곧 하느님의 보호 안에서 운항되었다는 것입니다.”

뉴저지 패터슨교구는 마리너스 수사의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깊이 새겨 그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전쟁 관련 시복시성 대상자들

한국전쟁 전후 북한 공산주의자에 처형된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 중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사진>와 동료 80위’는 한국 교회 차원에서 추진하는 근ㆍ현대 순교자의 첫 번째 시복시성 대상자들이다. 주교 2명, 몬시뇰 1명, 신부 47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 등 모두 81명이고, 서울ㆍ평양ㆍ광주ㆍ대전ㆍ춘천교구와 메리놀외방선교회,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파리외방전교회, 메리놀수녀회, 서울 가르멜여자수도원,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이다.


▲ 카폰 신부가 지프 앞 부분을 제대삼아 미사를 집전하는 모습.



병사들에게 초인적인 사랑을 베풀었던 미국 출신 에밀 카폰(Emil Kapaun, 1916~1951) 군종신부의 시복시성 운동도 미국 위치토교구에서 추진하고 있다. 1940년 사제품을 받은 카폰 신부는 1950년 7월 미 육군 군종사제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는 소속 부대가 중공군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철수 명령을 거부한 채 부상병을 돌보다 붙잡혀 평안북도 벽동수용소에 수감된다.

카폰 신부는 수용소에서 자신의 먹을 것을 다른 포로에게 나눠줬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병사들이 화장실을 가는 것을 도우며 옷가지를 빨아주는 등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결국, 카폰 신부는 1951년 세균에 감염돼 35살의 젊은 나이로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