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상)

(가톨릭신문)

17세기의 프랑스는 백년전쟁, 종교전쟁, 프롱드의 난 등 3세기에 걸친 오랜 전쟁으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황폐했다. 또 극단적인 이성주의, 합리주의, 정적주의, 엄격주의 등이 난무하여 정신적으로도 동요가 심했다.

이때 기존의 봉쇄수도원 활동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저변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여러 수도회가 작은 공동체를 이뤄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 곧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기도 했다.

프랑스 샬트르시에서 약 30㎞ 남서쪽에 위치한 보오스(Beauce)

평야 러베빌 라셔날 지역 마을은 전쟁 중 군인들이 통과하는 지대였다.

그래서 여러 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전쟁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피해는 비단 경제적인 피해만이 아닌, 사람들 마음 깊숙이 불신과 좌절을 심었고 삶의 의욕까지 잃게 했다.

당시 러베빌본당에 부임한 루이 쇼베(Louis Chauvet, 1664~1710) 신부는 이런 마을 주민들 처지를 파악하고 활력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극도로 가난한 이들의 참혹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깊이 움직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실제적이며 지적·도덕적·영적 가난을 들어 올리려는 열의가 차올랐고, 이런 쇼베 신부의 의지에 네 명의 여성들이 헌신적으로 응답했다. 이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일군 네 알의 밀씨였다.

1696년 이처럼 쇼베 신부에 의해 창설된 수녀회는 그때의 시대적·정신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린이 교육과 환자 간호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로 출발했다.

공동체는 1708년 샬트르시 생모리스가로 이전했고, 이때 새롭게 자리한 곳의 지명과 바오로 사도의 선교열을 본받으려는 정신에 따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로 부르게 됐다. 이 이름은 1861년 비오 9세 교황을 통해 교회 안에서 공인됐다.

수녀회는 1727년 남아메리카 안틸레스-기아나로 수녀들을 파견했는데 이는 여자수도회의 해외선교라는 새로운 장이 됐다. 이후 수녀회는 선교지를 확산시켜 나갔고 창립자 정신을 이어갔다. 무지와 가난,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게 하는 애덕의 삶으로 파스카 영성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현대 역사 안에서 눈여겨 볼만한 수녀회 역사는 1962년 총원을 이탈리아 로마로 옮긴 것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의 새로운 가르침에 따라 수도 생활의 쇄신을 이룬 것이다. 이로써 2020년 현재 40여 개국에서 4250명 회원이 다양한 사도직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창립 초기의 소명 실현에 투신하고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