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과 정약용, 동반촌 김석태 집에서 「조만과경」 바치고 미사 봉헌

(가톨릭평화신문)
▲ 김석태의 집이 있던 동반촌 지도 <한양도성도(부분)>.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일제강점기 성균관 문묘 인근 반촌의 풍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반촌은 고시촌이었다

김석태(金石太)는 이름 석 자 외에는 이렇다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1787년 이승훈과 정약용이 성균관 근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공부 모임을 갖다가 이기경에게 들켜서 이른바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 일어났다. 김석태는 이 집의 주인이었다. 김석태의 집은 어디에 있었고, 그곳의 공간 성격은 어찌 보아야 할까?

반촌은 19세기 초반 당시, 가구 수가 800에서 1000호가량 되고, 거주 인구가 1만 명가량 되던 특수한 구역이었다. 성균관은 전국에서 몰려든 유생과 과거 응시를 위해 머무는 응시생들로 늘 북적댔다. 오늘날 노량진의 고시촌처럼 고급 정보와 인프라를 갖추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서울 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반주인(泮主人)은 이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오늘날 대학가 하숙촌이나 원룸의 주인쯤에 해당한다. 때로 이들은 과거 시험의 브로커로도 활약했다. 수험생에게 필요한 답안지나 지필묵을 대신 구매해주는 역할도 맡았다.

반촌에는 이런 반주인들이 많았다. 또 지방마다 오늘날 강원학사나 호남숙사처럼 각 지역에서 올라온 자기 고장 출신들이 대놓고 왕래하는 집도 있었다. 이런 공간은 아버지의 반주인이었던 집에 그 아들이 대를 이어 들어가서 수험생 시절을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반주인과 유생의 관계는 훗날 그가 출세하여 벼슬길에 진출한 뒤에도 끈끈하게 이어졌다.

먼저 「송담유록」의 기록을 보자. “정미년(1787) 겨울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재(齋)에서 지내면서 과업(科業)을 닦겠다는 핑계로 동반촌(東泮村)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사서(邪書)를 강설하며 밤낮없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진사 강이원(姜履元)이 거짓으로 사학을 배운다며 마침내 그 집에 들어가, 서양의 책 이름과 설법 등의 일을 살펴 얻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벗 이기경(李基慶)에게 적발되자, 강이원이 한바탕 크게 놀라 그 즉시 그만두고 나왔다. 강이원이 그 주장을 벗들 사이에 누설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김석태의 집이 있던 곳은 성균관 아래 동반촌이었다. 동반촌은 지금의 명륜동 2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올라올 때 오른편 지역이다. 이곳에 하숙집들이 밀집해 있었다.



김석태의 집 위치와 공부 내용


1787년 10월 어름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서학에 열심이라는 소문이 크게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아지트가 바로 성균관 코앞의 동반촌이었던 것이다. 김석태의 집은 동반촌 중에서도 어디였을까? 뜻밖에 홍낙안의 문집 「노암집(魯巖集)」 권 3에 실린 ‘이승훈의 모함으로 인해 공술하여 변정한 상소(因李承薰誣, 供陳卞疏)’에 그 내용이 나온다. 이 상소문은 1791년 11월 진산 사건 이후 사학 문제로 시끄러울 당시, 신서파의 반격에 대응해서 쓴 글인데, 제목 아래 ‘도원불봉(到院不捧)’이라 한 것을 보면, 올리려고 들고 갔다가 정작 올리지는 못하고 간직해 둔 글이다. 공개된 글이 아니어서 「벽위편」 등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고, 문집에만 전한다.

이 글 가운데 김석태의 집 위치에 대해 쓴 대목이 있다. “저들이 모임을 가진 것은 바로 반촌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구석진 곳에 있었다. 문을 닫아걸면 한데 모이더라도 남들이 능히 엿볼 수가 없는 숨겨진 곳이었다.(渠之設會, 乃在泮村中最靜僻處. 闔門屯聚, 人莫能窺而隱然.)”

김석태의 집은 성균관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외지고 조용해, 대문만 닫으면 밖에서는 안쪽을 살필 수가 없었다. 동반촌 후미진 골목길의 끝 집이거나, 산자락을 끼고 있는 외딴 집이었을 것이다. 이는 「사학징의」 중 이우집(李宇集)의 공초에서, 유관검(柳觀儉)이 마련한 집회 공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궁벽한 곳에다 새로 사랑채를 지어놓고, 오직 함께 배우는 사람만 이곳에서 영접한다”고 한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한 이들의 행동에 대해 쓴 대목도 나온다. “그 아비를 속이고서 원점(圓點)을 핑계 삼아 젊은이를 유혹하여, 표문(表文)을 짓는다면서 밤낮 반민(泮民) 김석태의 집에서 경문을 외운 것이 과연 그가 아니었던가? 파리 대가리 만한 작은 글씨를 손바닥만 한 작은 수십 권의 책자에 쓰고, 비단 보자기에 싸서 궤 속에 넣어 둔 것은 그의 물건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침저녁으로 「조만과경(早晩課經)」을 외면서 남이 그 학문을 엄하게 배척하는 말을 들으면, 원수를 사랑함을 가지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저들이 무지하여 스스로 지옥에 빠짐을 슬퍼한다’고 말한 것이 그의 말이 아니었던가?”

내용이 대단히 흥미롭다. 「벽위편」에 실린 이기경의 「초토신상소」를 보면, 이곳에서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세 사람이 천주교 서적에 대한 스터디만 진행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아침저녁으로 경문을 외우고, 수십 권의 천주교 서적을 수진본(袖珍本) 크기의 작은 책자로 만들어서 공부했다. 또 「조만과경」을 들고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올렸다. 서학을 배척하는 말을 들으면 원수를 이웃처럼 사랑하라며, 그들이 무지해서 이것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제 탓이오’를 외치며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여기 보이는 「조만과경」이란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란 책의 제1권에 실린 내용을 따로 발췌해서 만든 소책자를 말한다. 그 구체적 내용은 최해두(崔海斗, 1668~1740)가 쓴 「자책(自責)」에 상세하게 나온다.

당시 이들은 천주교 교리 학습뿐 아니라, 이곳에서 정해진 날짜에 미사까지 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막 출범한 가성직 제도 아래 서울에 있던 두세 곳 본당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강이원은 자신이 이곳에서 읽은 서양 서적 이름과 사학을 배우는 절차를 온통 떠들고 다녔다. 사학이 문제가 될 듯하자 발 빠르게 발을 뺀 것이었다. 「눌암기략」에서는 “강이원은 얼마간 재간은 있었지만 말하기를 좋아했다. 채홍원에게 아첨하여 붙어 한 세상에 명성을 얻었으므로 기세가 당당하였다. 하지만 사람됨이 음험하고 사나웠다. 게다가 술주정을 부려대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고 부정적으로 적고 있다.



다산이 지은 김석태의 제문


「다산시문집」 권 17에 뜻밖에 ‘숙보(菽甫)를 제사 지내는 글(祭菽甫文)’이 실려있다. 제목 아래에 “반촌주인 김석태이니, 자가 숙보이다(泮村主人金錫泰, 字菽甫)”라는 풀이가 달려 있다. 석태(石太)를 ‘석태(錫泰)’로 달리 쓴 것이 눈길을 끈다. 반주인 김석태가 세상을 뜬 해는 알 수 없다. 1801년 이전이었던 듯하다. 전문은 이렇다.



지극 정성 하늘 뚫고 지극한 정 땅과 통해.

(至誠徹天, 至情徹地.)

날 위해서 잠을 깨고 나를 위해 잠들었지.

(寤爲余寤, 寐爲余寐.)

집안 살림 성글어도 날 위해선 꼼꼼했고,

(闊于家室, 而爲余密.)

이익 쫓음 게으르나 날 위해선 재빨랐네.

(慢于趨逐, 而爲余疾.)

남이 잘못 지적하면 칼 뽑으며 발끈했고,

(余咎人摘, 拔劍大嗔.)

나와 좋은 사람에겐 그를 위해 몸 바쳤지.

(人與余好, 爲之身.)

영혼 더디 빙빙 돌며 여태 나의 곁에 있네.

(魂兮遲徊, 尙在我側.)

저승 비록 멀다지만 가도 장차 기억하리.

(九原雖邃, 逝將相憶.)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정으로 자신을 돌봐주었던 김석태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가득하다. 집안 살림은 대충하던 그가 다산을 위한 일이라면 철두철미 꼼꼼했다. 돈 버는 일에는 손방이지만, 다산의 일이라면 그렇게 재빠를 수가 없었다. 누가 다산에 대해 나쁜 말이라도 하면 성이 나서 싸우려 들었고, 다산과 잘 지내는 사람에겐 속없이 기뻐하며 다 내주었다. 그러던 그가 홀연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늘로 오르지 못한 채 아직도 내 둘레를 맴도는 것만 같다. 다산은 천국이 아득히 멀지만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다짐으로 글을 맺었다.

다산이 자신의 문집에 이 글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김석태가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지 않은 채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정미반회사건 당시 의금부에 잡혀가거나, 훗날까지 살아 순교했더라면, 그의 제문도 문집에서 소거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글 속의 다산과 김석태의 관계는 마치 주임 신부와 본당 사무장의 관계와 다름없다. 그는 다산을 신부 모시듯 했다. 다산이 하는 모든 일에 앞장서서 돕고, 궂은일은 도맡아 하며, 주변까지 관리해주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자 다산은 깊은 정을 담은 한편의 제문으로 영결을 고했다.

반회가 열렸던 김석태의 집은 당시 서울에 개설된 명륜동 본당쯤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다. 주임 신부는 이승훈이었고, 얼마 못 가 정약용이 이를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시 쓰겠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