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예수수도회 (상)

(가톨릭신문)

메리 워드(Mary Ward, 1585~1645)는 최초의 여성 활동 수도회 예수수도회를 창립함으로써 교회 안에 여성들의 사도적 수도 생활을 개척한 인물이다. 영국 요크셔에서 신교(성공회)를 거부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6세기 영국은 엘리사벳 1세 여왕의 ‘가톨릭 금지법’에 따라 많은 이들이 신앙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순교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메리 워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도버 해협을 건너 스페인령 플랑드르의 작은 도시 생토메의 클라라 봉쇄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하느님이 수도원 안에서 고요히 기도하고 은거하는 삶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1609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앙의 억압과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며 같은 지향을 지닌 젊은 여성들 마음에 불을 붙였다. 특히 그해 늦가을 ‘영광의 현시’로 알려진 영적 체험을 통해 그들 삶에서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게 될 사명에 대해 더욱 굳은 소신을 지니게 됐다.

이 소명에 따라 그의 첫 동료들과 플랑드르 생토메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룬 메리는 당시 가장 소외된 계층이었던 여성들, 무엇보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이주한 영국 가톨릭 가정의 소녀들과 교육 기회가 전무했던 지역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1611년 병상에서 회복 중이던 메리는 ‘예수회와 같은 것을 택하라’는 말씀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의 생활양식에 따라 교회에 봉사하려면 트리엔트공의회가 여성 수도자에게 규정한 ‘봉쇄’로부터의 자유가 전제돼야 했다. 보수적인 성직자들 사이에서 거센 비난이 일었고 수도회 인준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방 제후들과 지역 주교들 요청에 응답해 벨기에 리에주, 독일의 쾰른과 뮌헨, 오스트리아 빈, 이탈리아 로마와 나폴리 등 여러 곳에 학교와 분원을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에 나섰다.

1631년 여성들의 사도적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 교회에 의해 수도회는 해체되고, 이단자로 고발돼 종교재판에 소환됐다. 종교재판소는 메리와 동료들에게 이단 혐의가 없다고 공표했지만 메리는 종교재판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로마에서 살아야 했다.

1637년 중병을 앓게 된 메리는 치료를 위해 세 명의 동료들과 로마를 떠났고 이 여정은 런던과 영국 북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병세는 깊어져 메리는 1645년 1월 30일 고향 요크셔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료들에게 “여러분의 성소에 항구하고, 성소의 본질을 참되게 살며, 성소를 사랑하십시오”라고 유언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남긴 말은 ‘예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메리 워드를 “영국 가톨릭이 교회에 선물한 견줄 데 없는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