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숙 수녀의 중독 치유 일기] (25)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가톨릭평화신문)


사람의 마음 안에 불편함을 증가시키는 요인 중 ‘분노’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표출하는 방식은 나이, 성별, 환경, 상황, 문화의 차이에 따라 강하고 거칠거나 혹은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개인 차이가 있지만, 중독 문제를 갖고 있을 때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들은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개별 상담을 하다 보면 수동적으로 저항하거나 분노로 가득 찬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술을 마시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녀들이라면 성장 과정에서 남들이 겪지 않는 심리적 고통을 내면에 깊이 묻어 놓고 살아간다. 이런 경우 어린 시절 정서적 지지와 안정적인 모성애의 경험 부재로 성인이 되었어도 아이와 같은 정서의 미숙함으로 살아가는 경우 ‘성인아이’라고 한다.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술 문제로 인한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자 상담하면서 질문을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무조건 “모른다”로 답변을 한다. “저는 잘 모르는데요?” “왜요?” “뭐가요?” “관심 없어요!” 수동적인 저항을 계속하거나 침묵한 채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분노와 개인의 비판에 쉽게 위협과 불안을 느끼며,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술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왜? 우리 엄마의 좋지 않은 모습을 이야기하느냐? 수녀님이 우리 엄마에 대하여 얼마나 아느냐?” 고 저항하기도 한다.

따라서 부모가 중독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상담할 때는 현재 정서 상태를 잘 파악하고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 오히려 마음을 굳게 닫거나 회피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마음속에 여러 가지 분노를 가지고 살아간다. 때로는 분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표출함으로써 심리적 부담감을 해소할 수도 있으므로 분노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들의 술 문제로 늘 가정에 불화와 폭력, 불안감으로 시달리면서 성장한 자녀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지 못하므로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알코올의존치료센터에 와서 받는 8주간 교육 중 중요한 개인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삶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자서전 발표이다. 회중 앞에서 자신의 부끄럽고 슬펐고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발표하게 되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참석한 모든 분이 돌아가면서 격려와 지지로 아낌없이 공감하는 위로의 시간이며, 타인의 자서전을 들으면서 각자 내면의 눈물과 억울함, 슬픔, 연민, 분노들을 다시 쏟아내는 화해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자서전을 통해 가슴속 분노들을 의미 있게 쏟아내는 이 작업은 각자의 삶을 새롭게 보게 하고 무엇보다 큰 선물인 “가슴 속에 평화”가 밀려오는 체험을 하게 한다. 자서전 발표 후 모두가 “가슴이 시원하고 홀가분하다” “제 마음에 평화가 왔어요” 라고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한다.

아픔과 분노를 평화로 바꾸는 순간, 이분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아듣지 않을까?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부천성모병원 알코올의존치료센터 상담 : 032-340-72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