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66)왜 부모의 희생이 자식에게 상처가 될까

(가톨릭평화신문)
▲ CNS 자료사진



“축복식 하시면서 마음이 벅차셨을 것 같은데 소감이 어떠세요?”

이른 아침,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와 인터뷰했을 때 받은 질문이다. 아마도 진행자는 나에게 “참 좋다. 보람 있다” 뭐 그런 답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형식적으로는 “뿌듯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고 답하면서도 내 마음속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착잡하고도 씁쓸하다’는 표현을 한 것 같다. 짧은 인터뷰에서 설명할 수도 없는 말을 내뱉고 나니 문득 미처 녹아내리지 못한 묵직한 마음 진동이 느껴졌다.

건축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누군가 “이혼하고 싶으면 집을 지으라”는 말이 있다면서 원래 집 짓는 일은 다 그런 거라고 했다. 사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녹아내면서 지독하게 ‘몸살’을 앓는 여정이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고작 1년 동안 짓는 ‘집’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평생을 만들어 가야 할 가정이란 집은 얼마나 많은 고난과 갈등을 녹아내야 튼튼하게 세워질까?

언젠가 H는 나에게 다가와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가정이야기를 했다. “‘얼러 키운 자식 효자 없다’ 하더니 정말 부끄럽기도 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 뭐예요.” 얼마 전 아버지를 저 세상에 보낸 후 나타난 H는 아버지를 보낸 슬픔보다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 너무도 급한 나머지 옆에 있던 화장지에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내용인즉 ‘아들에게 절대로 재산 한 푼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래 아버지는 아들밖에 몰랐어요. 논과 땅을 팔아 딸들을 제치고 그 애만 공부시키고 원하는 것 다해주었다고요. 그런데 이기적인 놈인지는 알았지만, 아버지에게 그 정도로 한이 되게 불효를 저질렀는지 정말 몰랐어요.” 하면서 울분에 빠져 원통해 했다. 듣는 순간에는 ‘어쩌면 그럴 수가…’ 하고 H와 함께 흥분했지만 돌아서서 은근히 드는 생각. ‘그런데 그 아들은 정작 부모에게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은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얼러 키운 자식에 효자가 없고” “집이 가난하면 효자가 난다”는 말을 할까?

언젠가 식탁에서 “부모에게 상처받은 젊은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나는 우리 엄마만 생각하면 그저 고맙기만 한데 말이에요” 하는 한 수녀의 말에 젊은 수녀가 대뜸 받아 대답했다. “그것은 부모가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야지’ 하는 기대를 하고 우리를 키워서 그러지 않을까요?” 나는 그 수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그에게는 부모가 자신에게 건 무거운 기대감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모는 모두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그러나 ‘얼러 키운 자식’에게 준 만큼 돌아오길 기대하는 부모의 무의식 속 욕망이 자식에게는 ‘고마움’이 아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빈곤으로 이어져 아파하는 이유는 ‘주었으니 내놓으라’는 은밀한 조건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건은 그 어떤 사랑과 희생이라도 마음의 생채기로 남게 한다. 생채기는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자칫 곪아 썩기도 하여 세상을 뒤틀리게 보고 또 그 흔적을 지우느라 힘겹게 살아간다.

집을 힘들게 짓고 나서 벅차고 설레는 마음이 아닌 착잡하고 씁쓸한 이유, 나의 희생에 대한 ‘조건’ 때문이었을까.



성찰하기

1. ‘실패는 인생의 종점에서만 말하라’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 지금 가정에 ‘위기’가 있다면 ‘기회’로 가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해요.

2. 어쩌면 10대 자녀들은 인생의 주기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만이 그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돼요.

3. 자녀에 대한 원망이 생길 때, 혹시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생에 대한 조건으로 은밀히 거래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