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 (81)그냥 좋은 건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가톨릭평화신문)
▲ 사랑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경우가 많다. 사진은 영화 ''프루프'' 중 한 장면. CNS 자료사진



“좋은 걸 어떡해/ 그녀가 좋은걸/ 말로는 곤란해 설명할 수 없어/ 그냥 네가 좋아/ 이게 사랑일 거야.”

한때 기타를 치며 즐겨 불렀던 노래다. 그런데 좋은 것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Y가 시집을 가겠단다. 엄마는 안달이다. 딸이 이제 겨우 두 번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서 도움을 청해왔다. 젊어서 예쁘고, 예뻐서 예쁜 Y가 해맑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사랑에 대하여 할 말이 참 많은 것 같았다. 남자친구를 안 지는 거의 일 년이 되었지만, 외국에 있어서 자주 못 만난 것뿐이고 거의 매일 전화로 소통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주 만나야만 아는 것이 아니란다.

Y는 10대 때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꾸준히 피아노 공부를 한 덕에 예술대학교에 갔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공부에 맛을 들였는지 석사 과정까지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는 나름 기대를 한 것 같다. 예술 분야에서 야심 차게 무언가를 해내겠다 싶었는데 아직 꽃도 제대로 피지 않은 것 같은 나이에 결혼하겠다니 주변에서도 어리둥절 야단이다.

그런데 Y를 만나고 나서 드는 생각, 이미 사랑에 빠진 자녀에게 필요한 건 단지 부모의 충분한 사랑뿐이라는 것. 비록 그 사랑이 어설프고 위험해 보여도 본인에게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경험이 많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당장 내일 깨질 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인정받고 축복받아야 할 권리도 있다는 것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랑에서 만날 고통은 결국 자신의 몫이기에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사실 사랑에 빠지면 뇌의 비판적 사고 기능이 억제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니까 사랑의 뇌는 상대방에 대한 그 어떤 부정적인 평가도 필요 없다고 판단한다. 남녀의 사랑이나 모성애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만 봐도 그렇다.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버티면서 자식들을 위해 맹목적으로 희생하며 살았을까? 오래전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어떻게 한둘도 아니고 여덟이나 되는 자식을 낳고 키울 수 있었을까요?” 그때 엄마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예뻐서. 너희가 그냥 예뻐서.” 그냥 툭 내뱉은 엄마의 그 한마디에 난 뜨거운 전율을 느꼈고 무척이나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가만히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봐도 그렇다. 나 역시 사랑에 빠져 수녀원에 왔다. Y의 낭만적 사랑이나 엄마의 모성애나 내가 하느님 사랑에 빠져들어선 수도생활이나 모두 그 어떤 합리적 이유는 없다. 그저 사랑하기에 지속적으로 문제에 직면하면서 부딪히고 견디고 버티고 고통받으며 산다. 어쩌면 고통은 내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나 고통스러운 재난은 피하고 싶다. 그래서 Y의 엄마는 딸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 고난을 피해가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미리 겁먹고 걱정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지금 누려야 할 기쁨의 순간을 놓쳐버리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성찰하기

1. 사랑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닌 무조건이라는 것을 믿어줘요. 어쩌면 그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2.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상상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오늘을 충분히 누리면서 즐겨요.

3. 사랑하는 나의 자녀나 배우자의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믿어줘요. 신뢰받고 있다는 그 고마움이 많은 것을 해결해 줄 테니까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