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시아에 왔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세례받기 전, 1937년 올더스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 (Ends and Means)」을 읽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추후 불교와의 대화를 다루면서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아시아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종교인들은 만난 것은 1960년대이다.

특별히 생애의 마지막, 초-문화적 성숙(Trans -cultural Maturity)에 도달한 머튼은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에 열중하였다. 그의 종교적 체험은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기 위한 개방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의 영적인 성장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와 동양의 종교들, 특히 선(禪)불교와 도교의 광범위한 지식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동양의 종교들은 그에게 영적 활기를 북돋우어 주었으며, 그가 관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교회 일치의 관점에서, 머튼은 개신교의 전통과 가까이 접촉하였는데, 제도적이고 성사적인 일치에 대해 희망하기보다는 성령을 통하여 그들과 영적인 일치를 찾고자 했다.

이번 호에서는 이 미국의 엄률 시토회 수도승이 어떻게 그리고 왜 아시아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두 달:1968년

머튼의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두 달은 특정 종교나 문화적 전통에 제한되지 않는 확장된 신앙과 관상의 통합된 경험이 심화된 특별한 시기였다. 그는 이 여행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은 그리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는 수도승’이 되기 위한 순례로 여겼다. 그는 더 위대한 영적 성숙을 얻기 위해 아시아의 지혜와 전통을 직접 경험하기를 원했다.

머튼의 아시아 방문을 위한 열정적인 원의는 1960년대 후반에 있었지만, 당시 겟세마니 수도원의 돔 제임스 폭스 아빠스는 그 여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968년 1월에 새로운 아빠스로 선출된 돔 플라비안 번즈는 이 여행을 허락하였고, 마침내 머튼은 1968년 10월 15일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아시아 여정을 시작하였다.

이 여정의 공적인 목적은 방콕에서 개최될 수도승 간의 회의 참석과 연설을 위한 것이었다. 국제적인 수도승들 상호 간의 네트워크인 AIM을 대표하여 머튼의 친구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장 르클로커 신부가 태국의 방콕에서 아시안 수도승들의 대표자 회의에서 머튼이 주요 연설을 하도록 초대한 것이다.

이 회의 전, 머튼은 ‘이해의 성전(the Temple of Understanding)’과 ‘인도의 종교인들을 위한 회합’에서 세계 종교 지도자들에게 연설하기 위해 인도 콜카타로 먼저 갔다. 이 모임에서 머튼은 동서양의 대화를 위해 수도승적 체험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관상적인 대화는 자기 초월과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도승들 사이에 영적인 친교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인도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와 세 차례 만남을 가졌으며, 족첸(Dzogchen)이라고 불리는 관상의 특별한 형태를 수행하는 여러 명의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들(Rinpoche)을 만났다. 머튼은 또한 소승불교 전통의 캄보디아 수도승들과 이슬람 수피즘(Muslim Sufism)의 대표자들과의 만남도 가졌다.

관상의 초-문화적이고, 초-종교적인 상태는 그의 가슴 안에 사랑과 은총의 창조적 활동으로 더 깊이 자신을 내어 맡기게 해 준, 그의 ‘폴론나루와의 해탈의 체험’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지금은 스리랑카인 실론섬의 고대 도시인 폴론나루와에서 머튼은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부처의 조각상들 앞에서 해탈의 결정적인 순간을 체험했다. 그는 이 불교 조각상들의 심미적인 체험에 압도되었으며, 비움과 성취의 변형된 의식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체험 이후, 머튼은 그의 일기에서 미래에 관해 불확실하지만 “이 여정은 단지 시작이었습니다”라는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그의 깨달음은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머튼은 1968년 12월 8일 방콕 도착 이틀 후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생활의 전망’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수도생활을 마르크스주의와 비교하면서, 수도생활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구조의 변화 대신에 ‘의식의 변형’을 통해 세상의 변화에 관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시아 문화와 종교를 향해 새로운 개방을 요청하였으며, 아시아의 전통들과 대화하는 것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요로움을 제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불행하게도 이 강의 후, 머튼은 피정의 집 자신의 방에서 선풍기에 의한 감전사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미국으로 운구되어 겟세마니 수도원에 묻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그가 27년 전 수도원에 입회한 날인 12월 10일이었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