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영성 나는 평신도다] (46)제언 - 제가(濟家) : 가정 복음화

(가톨릭평화신문)
▲ 평신도 사도직은 가정 복음화에서 출발한다. 근원적인 가정 문제 해결 없이는 복음 선포의 활로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진은 제주교구 중앙동성당에서 성가정 축복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가족. 가톨릭평화신문 DB

▲ 정치우 교장



2000년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시아 하잔 교수팀은 사랑에 빠진 성인 남녀 5000명의 호르몬 작용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가 놀랍습니다.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 사랑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 및 화학물질이 18~30개월 후부터 급격히 줄더랍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정적 사랑의 유효기간이 18~30개월인 셈입니다.

이 사랑의 유효기간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사상가 순자(荀子, BC 298? ~ BC 238?)는 인간 마음 작용을 ‘성(性) 정(情) 려(慮) 위(僞)’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성(性)은 배고프면 먹고 싶고, 성행위를 하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본성입니다. 정(情)은 이웃을 만나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또 려(慮)는 본성(性)과 감정(情) 다음에 나타나는 차원 높은 생각입니다. 배려, 헌신 등이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僞)는 의지를 통한 실천 행위입니다.

순자는 이 네 가지 중, 인간 마음의 가장 완성된 단계가 위(僞)라고 했습니다. 본성, 감정, 배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천적 사랑의 행위라는 것이죠. 부부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관계는 성행위와 단순한 정을 넘어 진정한 ‘배려’와 ‘실천적 사랑의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도 강조한 내용입니다.

흔히들 사랑은 자석의 N극과 S극이 끌리듯 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다릅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이 필요

따라서 결혼은 적령기가 되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고,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격을 갖추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18~30개월이 아닙니다. 생물학적 열정, 감정적 매몰의 유효기간이 사라지는 그 자리에 배려, 책임감, 헌신, 사랑, 신앙을 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성가정 대성당이 완성됩니다. 대성당의 기둥은 서로 떨어져 무게를 지탱합니다. 하나는 하느님, 둘은 부부, 셋은 가정 공동체입니다. 하나와 둘, 셋의 일치를 성취해 낼 때, 우리는 삼위일체 성가정 대성당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평신도 사도직은 가정 평신도 사도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이 실현되는 일차적 장(場)은 교회나 사회라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근원적인 가정 문제 해결 없이는 복음 선포가 활로를 찾기 힘듭니다. 이와 관련해 요즘 혼인하는 사람 중 한쪽 배우자가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당에서 하는 결혼식도 성사혼 보다는 관면혼인 경우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부모가 모두 신자일 때, 자녀들도 같은 신앙의 기쁨을 나누며 복음적 가치관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교우끼리의 혼인을 촉진하는 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세속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에 따른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혼인과 가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성생활에서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상, 자녀 갖기를 기피하는 현상, 이혼, 혼인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현상 등은 분명히 혼인과 가정을 위협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정의 소중함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은 “생명과 사랑의 요람이요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자리”이며, “개인과 사회의 ‘인간화’의 첫 자리”(「평신도 그리스도인」 40항)이기 때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이를 위해 우선 교회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가정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화의 단절 극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화 부재 현상은 이혼과 같은 가정 해체의 파경을 맞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대화’라는 말이 좀 딱딱하게 들린다면 ‘이야기’는 어떨까요. 자녀에게 혹은 배우자에게 “대화하자”가 아닌 “이야기하자”라고 말해보는 것을 어떨까요.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대화’가 아닌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그 이야기 속에 하느님이 분명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 미국에서 계약 공동체 생활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공동체 사람들은 매주 주말 가족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일주일간의 생활을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 시간을 통해서 서로의 생활을 알고 이해하게 되고 또한 도움이나 기도가 필요한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짝을 이루어 가정을 이룬다면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우(안드레아, 새천년복음화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