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가톨릭평화신문)
▲ 한민택 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관문인 예리코를 거쳐(자캐오와 만남) 긴 여행의 목적지에 다다르십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그 얼마나 고대하던 순간이던가요? 그러나 예루살렘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십니다. 오늘은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당시 고위 성직자, 행정가, 부유한 귀족 집단으로 구성된 상류 계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세의 삶을 부정하고 오직 현세적인 삶에 치중했으며, 부활이나 천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들은 같은 아내를 차례로 맞아들인 일곱 형제에 관한 억지 이야기를 만들어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사두가이들이 흐리게 한 논쟁의 초점을 부활 그 자체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돌립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되돌아갑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당신들,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의 복락에만 관심을 둔 여러분에게 과연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고 답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삶과 죽음의 구분을 초월해 계신 생명의 하느님이시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받은 그분의 자녀들이라고 말입니다.

부활이란 어떤 것이며,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부활 신앙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꿈만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며 생명도 죽음도 모두 그분께 속한다는 것, 그것을 믿을 때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삶은 새롭게 변화합니다. 사두가이들이 부활과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적 복락에만 치중하였기에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야 했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음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죽음은 다만 생물학적 수명이 다하는 것만이 아닌,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는 실제로, 삶을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생명을 위협하며 좌절과 절망, 공포와 두려움 속에 머물게 하는 무엇입니다.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죽음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 생명과 기쁨,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시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신앙을 독려하시며, 사후에 있을 삶에 대해 허황된 상상을 하기보다, 지금 여기서의 삶의 질을 높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삶의 곳곳에 퍼져 있는 죽음의 세력을 넘어 지금 여기서 당신 사랑의 힘으로 불멸의 희망을 품고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살고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 부활 신앙을 통한 새로운 희망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