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8)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13,13-52)<상>

(가톨릭평화신문)

▲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



사도행전 저자는 이제부터 ‘사울’의 선교 활동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전합니다. 파포스에서 총독을 믿음으로 인도한 바오로는 소아시아 지역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들어가 그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바오로의 설교(13,13-41)
 

바오로 일행 곧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갑니다. 그들이 조수로 데려갔던 요한은 그곳에서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오로 일행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습니다.(13,13-14)
 

페르게는 터키의 남서쪽 지중해변 항구도시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도시로 유명했다고 하지요. 바오로 일행은 이곳에서 요한 마르코와 헤어져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릅니다. 페르게에서 150㎞ 이상 떨어진 이 내륙 도시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63) 때부터 많은 유다인이 살면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다인 회당도 있었겠지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목적지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지요.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가 시작됐습니다.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에게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달라고 청하고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에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13,15-16)  
 

‘회당장’이 아니라 ‘회당장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 회당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을 지목해 격려 말씀을 청한 것은 바오로 일행이 외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지만 믿음 깊은 이들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당에는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 뿐 아니라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리아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처럼(10,2 참조) 유다교를 존중하고 유다교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1세기에 유다인 회당에서 이뤄지던 안식일 전례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먼저 “셔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신명 6,4-9; 신명 11,13-21; 민수 15,37-41)을 봉독한 다음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고는 율법 곧 모세 오경의 한 단락과 예언서의 한 단락을 봉독합니다. 이어 회당장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말씀, 곧 설교를 부탁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복(민수 6,24-26)으로 마무리한다지요.
 

이제 바오로의 설교 내용을 살펴봅시다.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다고 설파합니다.(13,17-26) 둘째 부분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단죄하고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다윗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예언을 실현하셨다고 선포합니다.(13,27-37) 셋째 부분은 회당에 모인 청중을 향한 호소 또는 경고입니다.(13,38-41) 이 셋째 부분은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바쿡 예언서를 인용한(하바 1,5) 경고입니다.
 

바오로의 설교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 설교한 내용(7,1-53)과 비슷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스테파노의 설교에 비해 훨씬 짧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분이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부분은 훨씬 깁니다.
 

두 사람의 설교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스테파노가 설교를 하는 대상인 예루살렘 최고의회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들이 저지른 죗값을 묻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길게 설명하면서 오시리라고 예고된 그분,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반면에 바오로는 조상들의 역사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는 데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은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들었을지 모르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고려해서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잘 아는 구약의 긴 역사는 대폭 줄이고 상당 부분을 예수님에 관해 할애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큰 차이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로마 3,21-31; 10,4.10-11 등)  바오로 특유의 신학적 사상이 담긴 표현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바오로는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하는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라는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하바 1,5)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칩니다.(13,40-41) 바오로의 설교에 청중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13,38ㄷ-39)라는 부분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체험이 깊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는 누구보다 충실히 율법을 지켰던 열렬한 바리사이파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과 깊은 회심을 한 후 그는 바뀌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곧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유다인이 많이 살았지만,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회당에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인들처럼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이 고백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보다는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