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내 마음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사랑의 일치

(가톨릭평화신문)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머튼이 쓴 저술과 일기, 서간 등을 통해 드러난 깊고 다양한 머튼의 영성을 다루고자 한다.

머튼의 생애에서 보았듯이 그의 영적 변화와 성숙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 수도원에서의 기도와 묵상, 침묵과 고독, 고행과 단순한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았다. 때로는 갈등과 번민을 겪었고, 깊은 관상적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영적 여정을 통해 그의 영웅적 우월주의는 무너져 내렸고,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같이 그 역시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 되어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일치를 이루었다. 그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일꾼이 되게 했다. 그래서 1960년대의 머튼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향해 다가가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영적인 유대를 맺고자 했다. 종교와 문화를 넘어 모든 이들은 보편적이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세상을 향한 개방성과 보편적이고 성숙한 사랑의 마음은 결국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고 계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에 근간을 둔다. 그가 자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 삶에서 끊임없이 자아의 욕망이 솟아나고 있고, 자신의 뜻을 다스린다는 것이 과연 말처럼 쉬운가?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관상적 체험이나 신비 체험은 봉쇄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승들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평신도들에게 관상적인 삶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관상적 깨어남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은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그는 무엇보다도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였으며, 많은 독서와 공부를 하였고, 외적 내적 갈등과 번민을 거쳐 그 해답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모든 관상적 체험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미’ 모든 사람 안에 관상의 씨앗이 심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모든 사람은 관상적 삶으로 초대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 이후로 교회 안에서 잊히거나 멀어졌던 관상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였고, 이것을 현대인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자신의 관상적 체험을 세상과 나누었으며, 관상을 통해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번 회부터 머튼의 기도와 관상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그의 다양한 영성, 고독과 침묵, 초연함, 영적 성장과 치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인식, 마리아 영성, 그리고 자기 비움과 자기 초월 등에 관한 그의 영성을 소개하고, 이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재조명해 봄으로써 작으나마 우리의 영적인 변화와 성장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한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독서’이다.

필자가 처음 머튼의 책들을 읽을 때, 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눈으로 글을 읽고 있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나 자신이 아직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머튼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반드시 갖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머튼의 저서들 가운데 「고독 속의 명상」, 「새 명상의 씨」, 「인간은 섬이 아니다」, 「마음의 기도」 등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