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9)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13,13-52) <하>

(가톨릭평화신문)


▲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이코니온으로 간다. 사진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설교한 후 회중의 반응과 그 후속 상황에 대해 사도행전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살펴봅니다.(13,42-52)


 “그들(바오로 일행)이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13,42) 이로 미루어 회중은 바오로의 설교에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회중이 흩어진 후에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바오로 일행을 따라왔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지요.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듭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지요.(13,44-45)  
 

이 구절을 볼 때 유다인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 호감을 갖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이들과 바오로 일행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반대자들은 왜 반감을 갖게 됐을까요? 우선 이들은 도시와 회당에서 기득권 세력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자기들 대신 바오로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함으로써 자기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결국, 한편으로는 시기심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자기들의 신념을 거스른 데 대한 분노에서 유다인들은 반감을 갖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13,46)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인들에게 먼저 전해야만 했다는 말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고 하신, 그리고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마르 7,27)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이 ‘사도행전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지요. 그러다가 점차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가 베드로 사도가 본 환시(사도 10,9-16)와 코르넬리우스 집안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린 일(10,44-45)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활동은 이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힘”(로마 1,16)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13,57)
 

이사야 예언서 49장 6절을 인용한 이 성경 말씀은 원래는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를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곧 자신들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두 사람은 유다인을 넘어서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파견을 받은 이들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이런 말에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 말씀을 찬양합니다. 또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집니다.(13,48-49)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졌다는 표현을 두고 이른바 ‘예정설(豫定說)’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지만, 학자들은 유다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일 따름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쫓아냅니다. 바오로 일행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갑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13,50-51)
 

생각해봅시다


1.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바오로 일행을 쫓아낸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시기심은 눈을 가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심은 또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비롯합니다. 시기심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기를 비우고 진실에 귀를 기울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나약함을 지닌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갇혀 있지 말고 더 나은 선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
 

2.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대목 또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또는 추진했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풀릴 때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합니다. 반면에 뜻대로 되지 않을 때나 반대에 부딪혀 일을 그르치게 될 때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거나 좌절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노력했는데 엇나가게 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꾼’들이라면 그럴 때도 기뻐할 수 있음을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1-12)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라는 말씀을 따라, 해야 할 일을 다 하면서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겨드린다는 자세를 지닌다면, 우리는 역경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순교 선조들은 이미 그렇게 사신 분들입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