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체험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는 부족하다

(가톨릭평화신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또한 이 세상을 초월해 계신다. 자연 안에 내재(immanence)해 계시지만 동시에 자연을 넘어 초월(transcendence)해 계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무한한 초월성’ 때문에 인간의 하느님 체험에 대한 묘사는 인간 언어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래서 이것은 항상 은유나 비유, 혹은 시(詩)나 상징을 통해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종교적 혹은 신비적 체험을 한 이들의 이에 대한 묘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자신이 속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종교를 넘어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서로 나눔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더 풍성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식별이 필요하다. 거짓 하느님 체험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식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의 열매이다.



하느님 체험에 대한 묘사와 불교 용어들과의 만남

머튼에게 있어 불교와의 만남은 그에게 선(禪) 체험의 풍부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내면의 관상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불교의 용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승인 바실 페닝톤(Basil Pennington)은 “동양 사상은 (서방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이 시도해 왔던 매우 표현하기 어려운 모든 내적인 일치에 대해 묘사를 하는 데 있어 머튼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신학자 앤 카르(Anne E. Carr)도 “머튼은 동서의 관상적 전통들 안에서 증언된 단순함과 지혜의 목표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머튼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내적 체험에 대해 불자들이 말하는 다른 방식을 자연스럽게 공감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후기 글들에서 그는 관상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불교의 용어인 ‘무아(無我)’, ‘공(空)’, ‘깨어남(悟)’ 등을 사용했다.

머튼에게 있어 불교 용어의 사용은 모든 신비적 체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모든 종교는 “그 꼭대기에서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안이한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교의 용어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불충분한 종교적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혹은 아트만(Atman) 혹은 공(空)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은 인간의 생각들과 이미지들의 영역 안에 모두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

머튼은 종교적 체험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인간 언어의 한계와 불충분함을 날카롭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전통으로부터 다양한 해석과 용어를 빌려 오는 것은 상호 풍부함을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머튼과 불교에 대한 권위자인 보니 떠르스톤(Bonnie Thurston)은 비록 머튼의 관상적 체험이 자신의 그리스도교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을지라도, 그는 종교적 체험의 불교적 설명들을 통하여 그것을 더 분명히 표현하는 적당한 용어들과 방법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샤논(William Shannon) 역시 머튼은 “그리스도교의 신비적 체험에 가장 적절한 통찰을 제공하기 위해 특별히 선(禪)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머튼은 서양의 관상가들과 동양의 스승들 사이에 종교적 체험의 합류점을 발견하였다. 그는 선(禪)의 스승들 사이에 참된 신비주의의 가능성을 구상하였으며, 서양의 신비주의의 범주를 넘어 표현된 그들의 체험이 그리스도교 영성을 풍성하게 하는 재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적 체험의 가치와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두 전통으로부터 용어들의 상호 교환의 진가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머튼과 동양의 전통들, 특히 불교와의 대화를 촉진시켰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