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10)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상)

(가톨릭평화신문)


사제품을 받고 경기도 광주의 한 본당에 첫 보좌 신부로 부임한 지도 벌써 23년이 흘렀다. 첫 부임지에서 만난 주임 신부님은 연세가 지긋하시고 마음이 따뜻하신 노사제이셨다. 주임 신부님과 나는 선배와 후배 사제가 아닌 할아버지와 손자의 마음으로 한 해의 짧은 사목 생활의 연을 이어갔다.

어느덧 대림 시기가 되어 주임 신부님은 부임하신 이래로 첫 구역 판공성사를 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동안 거동도 불편하시고 연세가 있으신 관계로 가정 방문과 구역 미사를 드릴 수가 없었던 주임 신부님으로서는 보좌가 부임하였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분은 자신의 집에 신부님을 모신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여느 본당과 마찬가지로 본당 관할 내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려운 살림에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에게는 신부님이 가정을 방문한다는 사실이 여간 부담스럽고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임 신부님은 전 세대 가정 방문을 추진하셨고 대신 신부님을 맞이할 때는 절대 음식을 준비하지 말고 차 한 잔 정도만 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주임 신부님과 나는 서로 구역을 나누어 세대를 방문하였다. 물론 주임 신부님은 하루 한두 세대 방문하시는 것으로 일정을 마감하셨고 나머지 세대는 아직 힘이 넘치는 보좌 신부의 몫이었다.

본당의 각 가정을 방문하면서 신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한 가정도 시련과 고통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나름대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어려운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도 이분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묵히 견뎌내고 계셨던 것이다. 본당 신자들의 삶과 고통을 직접 체험하면서 앞으로 어떤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를 많이 묵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주임 신부님은 앞으로 사제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체험하도록 배려함으로써 나에게 첫 번째 성탄 선물을 선사하셨다.

첫 판공 기간 만난 많은 신자 중에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한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집이 아닌 반지하 토굴에서 살고 계셨다. 지면에서 사선으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비닐하우스를 묻은 것과 같은 모양의 주거 형태였다. 비닐 막을 걷고 안으로 거의 기어들어가니 2~3평 남짓한 공간에서 할머니가 기쁜 모습으로 반겨주셨다. 단 10분도 앉아있기 어려워 봉사자 2명은 나를 놓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역한 냄새로 안에 앉아있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30여 분 대화를 나눈 후 고해성사와 강복을 드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날려 문앞을 큰 대자로 가로막으시며 신부님이 오신다고 준비한 유자차가 있는데 그걸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그 차를 마셔야만 여기서 나가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할머니 성의를 봐서 그러겠다고 다시 자리를 앉았다. 할머니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옷장 위에 놓아둔 유자청 단지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 한 숟가락 유자청을 퍼 올리셨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자청 위에 뽀얗게 앉은 곰팡이가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신부님 오신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유자청은 결국 너무 오래되어 곰팡이가 피어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 유자청을 3년 전에 선물 받았는데 당신이 먹기엔 너무 아까워 가장 귀한 손님에게 먼저 대접하시겠다며 지금까지 보관하였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에 신부님이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그 귀한 유자청 단지를 이제야 개봉하게 되었다면서 너무 기쁘고 영광이라며 좋아하셨다. 참으로 난감했다. 이미 상한 유자차를 확인한 이상 마시기도 그러했고, 그렇다고 안 마시자니 할머니의 정성을 외면하는 것 같아 여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