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활동

(가톨릭평화신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관상은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이요, 만남이자, 친교(Communion)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 체험을 묘사하기 위해 언어와 개념, 이미지 등 매개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진다.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기 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관상,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이며 친밀한 친교

영성신학에서는 이러한 관상을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혹은 순수한 관상’으로 나누어 설명을 해왔다. 수득적 관상은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禪)은 이에 해당한다.(「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참조)

반면,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과연 인간의 노력으로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하며, 이러한 인간의 노력 역시 영적 활동의 일부분이라는 견해도 있어, 수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의 구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토마스 머튼은 초기에 이러한 구분을 따랐지만, 후기에 갈수록 이런 구분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는 모든 관상은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것이다.

머튼은 관상 생활의 여정과 체험을 통해 관상에서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상에서 오는 고요함과 평온 역시 하느님이 아니기에 영적 집착인 것이다. 관상가가 되는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체험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며, 모든 것은 관상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자신을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이러한 관상의 열매에 대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관상의 삶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삶의 가장 높은 형태는 다른 사람에게 관상의 열매를 전하는 관상가라고 말했다.

토마스 머튼 역시 사랑의 열매가 없는 관상은 관상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그는 관상은 살아있는 실재로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향해 방향 지워진 자유로운 마음이라고 묘사했다. 깊은 관상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유라는 말은 달리 말해 관상은 인간의 활동을 넘어 신적인 활동이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관상가 안에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상은 하느님 안에서 영혼의 내면을 향한 바라봄과 마음의 단순한 응답이다. 따라서 묵상과는 달리 관상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해소한다. 이것은 우리가 시작하거나 일어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적인 활동이며 우리의 활동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분이 오시기를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분이 오시기를 깨어 기다리며 준비

따라서 토마스 머튼은 관상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했다. 수득적인 관상이든 주부적인 관상이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자연과 초자연은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선물이기에 자연 안에 초자연적 요소가 있다. 관상은 초자연적 창조주의 선물로 주어진 자연의 충만함인 것이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관상을 정의한다.

“관상은 일깨워주는 뜻밖의 은총, 모든 실재 안에서 실체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주는 뜻밖의 선물입니다. 유한한 우리 존재의 뿌리에 있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일깨움입니다. 우리의 우연적 실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거저 받은 사랑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관상은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선물입니다…. 우리 노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새 명상의 씨」 17-19)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