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우리 내면에 이미 와 계신 하느님 깨닫기

(가톨릭평화신문)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필자가 성소 담당자로 8년간 소임을 할 때, 참 많은 젊은이를 만났다. 그 과정에서 초기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진 이는 관상 수도회에 어울리고, 외향적인 이는 활동 수도회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성격과 수도생활은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성령에 의해 하느님 신비 안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관상 역시 마찬가지다. 관상은 수동적이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앉아서 생각에 빠지는 것도 초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관상은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요, 전례를 통해 평화와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관상을 체험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필수적이나 이것이 저절로 관상에 이르게 해 주지는 않는다. 때때로 별다른 노력 없이 갑자기 관상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일깨우려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시다.

머튼이 말하는 관상은 지적인 성취가 아니다. 책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에 관한 신학적 통찰력 이상의 것이며, 어떤 황홀이나 무아지경, 감정적 흥분이나 감미로움이 아니다. 관상이 가져오는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관상은 성령에 의해 하느님의 영역 안으로, 하느님의 자유 안으로,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때때로 관상을 통해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고통이 수반된다. “하느님은 내가 알 수 있는 ‘무엇’이 아니며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순수한 ‘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는 있다’입니다.” (「새 명상의 씨」, 28)

머튼이 깨달은 관상은 기도의 실천 이상의 것이며, 다음의 세 가지 체험과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을 찾는 체험, 자신의 참된 자아를 깨닫는 체험, 그리고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배우는 체험.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서로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다.

먼저, 머튼에게 있어 관상은 하느님을 찾는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잃었던 무엇을 찾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내가 아는 모든 곳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한 번 찾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전부도 아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머튼은 관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앎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앎은 성경이나 이성 등의 밖으로부터의 앎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이다. 관상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느님과 우리가 이미 하나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머튼은 관상에 있어 깨달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앎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의 깨달음


“관상은 영적 놀라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며 무한히 풍요로운 ‘원천’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관상은 우리가 아는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두 초월하여 압니다. 관상은 그 원천의 실재에 대한 깨어남입니다. 관상은 깨어남의 갑작스러운 선물이며, 그것이 실재(real)라는 모든 것 안에서 궁극적인 실재(the Real)를 깨닫는 것입니다.”(「새 명상의 씨」, 15-17)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시다는 깨어남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관상은 외적이거나 표면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이고 영적인 것으로의 의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우리 내면의 세상 안에서 궁극적인 실재인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표면적 수준 아래를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실재의 다른 측면이나 더 깊은 단계에서 하느님과 자아와 창조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 절감할 때 하느님 만나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속도, 생산성, 이익, 외적인 것들을 강조하고 있어 깊은 내면의 영역이나 영적인 체험의 영역에 도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내면의 세상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을 한가한 이들의 사치(?)이거나 비생산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적이고 표면적인 허상을 좇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신의 내면에 찾아온 공허감과 감당하기 힘든 외적 내적 고통,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우리는 결국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우리를 찾고 계신 하느님, 이미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쌓아 놓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날 우리는 자신을 더 큰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어진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이 하느님을 찾았고 그래서 그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은 늘 자신과 함께하고 계셨음을! 다만 자신이 눈이 어두워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음을!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