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70)에필로그<5>- 사도행전에 비춰본 바오로의 생애와 서간④

(가톨릭평화신문)
▲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과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쓰고, 마케도니아에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을 쓴다. 그리고 코린토에 와서 3개월 지내는 동안 자신의 신학적 사상을 정리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쓴다. 사진은 바오로의 제자 에파프라스가 복음을 전한 콜로새 인근 라오디케이아의 유적.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27개월 동안 지내면서 선교 활동에 큰 성공을 거둡니다. 복음은 에페소 인근 도시들까지 전파됩니다. 사도행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오로의 제자 에파프라스의 활동으로 에페소 동쪽 200㎞쯤 떨어진 도시 콜로새를 비롯해 그 근처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케이아 같은 고을들에도 공동체가 세워집니다.(콜로 1,7; 2,1; 4,12-13 참조) 하지만 눈부신 선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에페소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에페소 감옥에 갇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겪은 시련으로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만드는 은장이 데메트리우스의 사주로 인한 소동을 전합니다만(19,23-40),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내가 에페소에서 이를테면 맹수와 싸웠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1코린 15,32)라며 에페소에서 모진 시련을 겪었음을 언급합니다. 또 둘째 서간에서는 아시아 곧 에페소에서 겪은 환난과 관련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2코린 1,8-10) 이 말은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고 전합니다.(필리 1,13)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에 갇힌 것이 데메트리우스로 인한 소동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의 친서 가운데 하나인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바로 이 에페소 감옥에서 썼다는 데에 많은 학자가 의견을 같이합니다. 일각에서는 에페소 감옥이 아니라 나중에 로마에서 죽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필리피 서간을 썼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필리피 서간을 썼다면 그 시기는 에페소에 머무른 초기가 아니라 적어도 중기 이후일 것입니다. 그래서 55년을 전후한 시기에 바오로가 에페소 감옥에서 썼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바오로는 에페소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또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서간의 수신인 필레몬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필레몬서의 내용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그는 콜로새 교회의 주요 인사로, 바오로의 영향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자기 집에서 신자들의 모임을 열 정도로 신심과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간은 한때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를 잘 거두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바오로가 직접 필레몬서를 썼다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습니다만, 편지를 쓴 곳이 에페소 감옥이 아니라 바오로의 말년, 그러니까 순교하기 전에 로마 감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오로가 필레몬서를 에페소에서 썼다면 그 시기는 필리피서를 쓴 시기와 비슷하게 55년 전후가 될 것입니다. 만일 로마의 감옥에서 썼다면 바오로의 순교 얼마 전인 60년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복음 실천 권고

한편 바오로가 아직 에페소에 머물고 있을 때 갈라티아 교회로부터도 심상찮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갈라티아는 남쪽으로는 바오로가 1차 선교 여행 때에 복음을 전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등지를, 북쪽으로는 2차 선교 여행과 3차 선교 여행 때에 들린 북부 지방의 안키라(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 부근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교회 신자들이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저버리고 예전 생활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들을 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인도가 아닌 육의 행실에 따라 불륜과 방탕과 우상숭배와 분쟁과 시기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 자신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면서 율법이 아니라 은총에 따라, 육의 행실이 아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도록 권고합니다. 이것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학자들 사이에는 서간의 수신인인 갈라티아 신자들이 남부 지방 신자들인지 북부 지방 신자들인지를 놓고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만, 바오로가 2차와 3차 선교 여행 때에 거친 북부 지방 신자들이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코린토 교회의 회개를 전해 듣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페소를 떠나 트로아스를 거쳐 마케도니아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에페소에 있을 때 코린토에 보낸 티토를 만납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등을 위해 코린토를 방문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요. 에페소로 돌아온 그는 괴롭고 답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쓴 이른바 ‘눈물 편지’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코린토 신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이자 협력자를 코린토 교회에 파견했는데, 그 사람이 티토였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티토를 만나 코린토 교회의 좋은 소식을 전해 들은 바오로는 이제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데 이것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입니다. 이 둘째 서간의 10장에서 13장까지는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쓴 이른바 ‘눈물 편지’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마케도니아에서 코린토2서를 쓰고 난 바오로는 56년(또는 57년) 말쯤에 코린토에 도착합니다. 그의 세 번째 코린토 방문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3개월가량 머물면서 자신이 이미 에페소에서부터 가고 싶어 했던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데 이것이 바로 바오로의 신학적 사상을 집대성한 내용을 담은 편지로 평가받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사실 바오로가 세 번째 선교 여행 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곧 코린토를 둘러보고자 한 것은 두 번째 선교 여행 때 복음을 전한 이 지역의 교회들을 찾아 신자들을 격려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목적도 있었습니다. 한때 코린토 신자들과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와 코린토까지 내려오면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로마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배를 타고 시리아로 바로 건너가고자 했지만 유다인들이 자신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고는 마케도니아를 통해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필리피와 트로아스를 거쳐 밀레토스로 내려옵니다. 그곳에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을 불러 작별 인사를 한 후 바오로는 마침내 시리아 땅 티로에 도착하고 프톨레마이스와 카이사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사도 20,3─21,16)

그러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얼마 있지 않아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들의 선동으로 성전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리아로 호송된 후 그곳에서 2년을 지내다가 황제에게 상소한 후 마침내 수인의 신분으로 61년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바오로는 수인이었지만 셋집을 얻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다”(사도 28,32)고 사도행전은 바오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alfonso8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