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가톨릭신문)


‘사람대접 못 받는’ 모욕의 순간은 우리가 정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혹은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좀 더 분명히 말한다면,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그들이 판단했을 때) 발생합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환대받지 못하며 그래서 존재가 부정되고 마는 비극은 우리의 일상 도처에 기생(寄生)하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태오복음서는 크게 5개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은 그 두 번째 ‘파견 설교’에 속해있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을 언급하시는데 첫 시작부터 가히 파격적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혹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27)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유대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족 간의 사랑을 부인하는 듯한 말씀이 억지스러운 위협과 심각한 독선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이러한 난처한 말씀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본문을 복음서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큰 맥락을 이해하게 되면 본문의 역설도 조금은 수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박해를 각오하라’(10,16-25)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10,26-33)는 말씀 다음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가족’을 모티브로 한 단락에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듯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며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설 것’이라고 예견하시고 급기야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10,34-36)라고 까지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 말씀 바로 다음에 오늘 복음의 첫 부분(“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마태오복음서가 제작되던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이해 가능한 구절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완성되었는데, 당시 유다 내부사회는 계급간의 갈등과 부패로 심각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이 주둔하여 사태를 정리하는 계엄 상황에 들어가게 되고, 이에 저항하던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파국적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의심과 박해를 받아야 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 때문에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칼을 주러왔고 가족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 때문에 감수해야했던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와 버림받음을 암시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 집착에서 벗어난 환대

과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대립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가장 먼저 등장하는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문장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 문장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 위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가치가 없다.”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필레오’로서 누군가에게 매력과 호감을 느끼고 애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초성적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동사 ‘아가파오’에서 파생)와 구별되는 감정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애착의 위험성과 집착이 수반하는 속박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착할 때 발생하는 불안, 질투, 실망, 미움은 인간을 파괴하는 치명적 무기가 되며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인간은 훨씬 더 풍요롭고 안전하며 충만한 유기적 공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한 사람에 대한 집착을 접고, 대신 주변 이웃들을 ‘받아들임’과 그 결과로 ‘받게 되는’ 보상(40-41절)에 대해 언급합니다. “받아들이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코마이’이며 이는 ‘환영하다, 인정하다, 인내하고 참아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를 환대하고 존중하며, 그의 모든 것을 인내하고 참아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게 무조건적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환대로 보상받게 되는데 특별히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42절)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작은이들”은 스스로 보상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상하시는 것입니다.



■ 환대와 보상

이러한 환대와 보상의 상호성은 제1독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넴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 모셔 음식을 대접하고 환대합니다. 이는 그녀가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2열왕 4,9)으로 인식했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사람을 환대한 것은 곧 하느님을 환대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환대는, 나이 많은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여인의 임신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부인은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16절)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집착은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진심과 선의를 무기력하게 하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을 예수님 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은, 사실 부질없는 집착이나 애착을 넘어서는 넓은 사랑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열렬하고 충실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 되고 맙니다. 폐쇄적이기에 치열하고, 치열할수록 맹목적인 가학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포기하거나 버림을 의미하지 않고 ‘믿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를 믿지 못할 때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 그런 놓을 수 없음이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믿을 때 자유로울 수 있고 관대하며 유쾌하고 따뜻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결속과 연대의 미명아래 자행되는 배타적 집착에서 벗어나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고 서로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존중하는 환대입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