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민 신부의 별별 이야기] 내 안의 다른 나 (하)

(가톨릭평화신문)


소피아는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수학 시험 중 갑자기 공황증상이 찾아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하여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가게 되었다. 시험을 정상적으로 치르지 못한 소피아는 그러나 운이 좋게도 성적 구제 대상으로 선정되어 기본 점수를 받게 되었다. 소피아에게는 이 사건이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행운이었다. 매번 낙제 점수를 면치 못한 소피아에게 있어서는 이때 받은 기본 점수가 지금까지 치렀던 수학 시험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였기 때문이다.

수학 시험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공황증상을 체험한 후 생각지도 못한 이익을 얻게 된 소피아는 점점 공황증상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안하거나 벗어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공황증상을 겪을 수만 있다면 그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상을 반복하면서 원의를 갖게 되자 실제로 공황증상들이 체험되기 시작하였다. 조금만 불안하거나 회피하고 싶은 상황이 생겨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신체가 알아주는 것처럼 호흡이 빨라지면서 공황증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어려운 시험을 회피하고 싶을 때, 참여하고 싶지 않은 과외 활동에서 열외를 받고 싶을 때, 혹은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부모님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여지없이 자신의 몸은 공황증상을 만들어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공황증상은 자신이 원할 때만 발생해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 증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에서 몇 계단만 올라가도 숨이 가빠지면서 과호흡증후군이 발생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조금만 놀라도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공황증상이 발생했다. 성당도 갈 수가 없었다. 성가만 불러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의자 옆에 누가 앉아만 있어도 가슴이 답답하여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했을 때 반갑게 찾아왔던 공황이라는 친구가, 이제는 원치 않는 상황에서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흔히 ‘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의식적 자아’는 수의근(隨意筋)을 통해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의식적인 자아가 아닌 무의식적인 자아, 즉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자율신경계를 통해 불수의근(不隨意筋)을 움직인다. 의식적 자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무의식적 자아에 기대할 경우 근시안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자신의 심리적이며 신체적인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라파엘의 경우는 무의식적 자아가 나타나 망상증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현실 도피를 도와주었고, 소피아의 경우는 무의식적 자아의 명령을 받은 자율신경계가 공황증상이 생존에 필요하다고 오판하여 수시로 증상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라파엘은 군대 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소피아는 시험에 대해서 각기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망상이라는 병이 아니라 친밀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해결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소피아 역시 신체적 증상을 통한 도피가 아니라 좀 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불안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적 삶의 과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자신 안에 또 다른 나, 즉 무의식적 자아가 나타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지금 나는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에 또 다른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현존의식이야말로 나의 불안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아마도 우리는 이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아직도 불안의 강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생태마을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