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현장에서] 예수님 따라가기

(가톨릭평화신문)
▲ 김호균 신부



“야 인마! 줄 안 당기고 뭐 해?”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본당 총무도 당황했다.

“사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일 도와주러 온 분이에요.”

그랬다. 동물병원을 운영했던 본당 총무는 자주 소 채혈을 하러 다녔다. 각 농가가 소를 판매하려면 브루셀라병 검사를 한 후에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채혈을 해야 했다. 나는 동물병원이 본당과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 되면 그곳에서 시간을 죽일 때가 많았다. 채혈이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따라나섰다. 소 채혈은 소를 붙잡아서 밧줄로 고정하고, 주사기를 챙겨서 피를 뽑고, 다시 병에 넣고, 기록해야 하기에 혼자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둘이서 하면 쉬웠다. 오래 하다 보니 서로 손발이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욕을 얻어먹었으니 본당 총무가 느꼈을 불편함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차마 “신부님입니다”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일 도와주시러 오신 분”이라는 말로 마무리하며 겪었을 총무의 뜨끔한 마음을 직감했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들이 비난과 욕으로 돌아올 때가 더러 있다. 상황에 따라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그냥 넘어가 주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할 때도 있다. 한쪽은 지혜가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인내가 필요하다. 이번의 경우에는 후자의 선택이었고,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타당했다. 지금도 그 시점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많은 경우 변명의 근거를 잡으려고 안달할 때가 있다. ‘희생과 인내’라는 가치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지금 변명과 반박은 우리가 연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치 구원의 빛으로 비춰지는 착시를 불러오기도 한다.

시대적으로 품위 없는 말들이 난무한다. 말씀이 말로 격하되고, 말이 짐승의 소리로 들리는 환청에 시달리는 지금의 시대에 깊은 생각 속에서 표현되는 신앙인의 행동이 그립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인간의 교활함에 속에 돌아가셨음을 알고 있다면 죽기 전에 우리도 한 번쯤은 ‘희생과 인내’라는 삶을 실천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김호균 신부(대구대교구 노동사목부장)